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은수(殷叟), 호는 춘포(春圃). 아버지는 증승정원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 유유(柳愉), 어머니는 부유심씨(富有沈氏)로 숙부인(淑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전주에서 출생해 최명룡(崔命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부친이 피난처에서 사망하자 19세의 몸으로 시신을 손수 짊어지고 고향에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의 신분으로 손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지어 사방에 발송하고 군사와 식량을 모아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다. 그 해에 사마시에 합격해, 사신의 일원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627년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成均館)의 학유(學諭)·학정(學正)·전적(典籍)과 양현고(養賢庫)의 봉사(奉事) 등을 역임하였다. 이인거(李仁居)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1등소무원종공신(一等昭武原從功臣)에 책록(冊錄)되었다. 1631년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다.
그 후 보령현감(保寧縣監)을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과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던 중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임금을 배종(陪從)했는데, 이 때 유신로는 화의(和議)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후로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보성군수(寶城郡守)·창원대도호부사(昌原大都護府使) 등을 역임했으며,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는 『춘포유고(春圃遺稿)』 1권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