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지방 행정기관의 말단에서 시작하여 도지사까지 지낸 인물이다.
1881년 6월 21일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당하리에서 출생하였다. 탁지부 평양재무감독국 보천재무서 서장을 거쳐 1909년에 재무서 주사(主事)가 되었다. 이후 1910년 10월 위원(渭原) 군수로 발탁된 이래 여러 지역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1911년 10월부터 곽산(郭山)군수를 지냈고 1914년 3월 벽동(碧潼) 군수로 전근하였다. 1914년 7월에 곽산군수 재임 중 횡령혐의로 문관징계령에 의해 문책을 받았지만 관직생활에 손상을 입지는 않았다. 1915년 일본 정부로부터 다이쇼대례기념장[大正大禮記念章]을 받았고,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자 1917년 8월부터 1918년 3월까지 평북지방 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12월부터 1921년까지 선천군수를 지냈고, 1921년 4월에는 ‘군수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21년부터 1927년까지 도지사의 자문직이며 부지사격에 해당하는 평북 참여관과 강원도 참여관(1918∼1929)을 지냈다. 1929년 11월 충남지사로 승진하여 1931년까지 재직하였다. 1930년 2월에는 일본의 사회교화단체인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관직 재직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1922년 5월에 훈6등 서보장, 1926년 7월에 훈5등 서보장, 1930년 1월에 훈4등 서보장을 받았고, 1931년 10월 귀족의 예우에 준하는 종4위에 서위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러 외곽단체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1932년 5월부터 1945년 2월 사망할 때까지 약 13년 동안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고, 같은 해 7월 중추원시정연구회의 산업부 위원을 지냈다. 1937년 9월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시국선전을 위해 조직한 시국강연대의 연사로 충청남도 일대를 순회하며 선전활동을 벌였다. 1941년에는 중추원 부여신궁공사 근로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0년 친일 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41년 8월 황국(皇國)정신의 고양을 내세운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같은 해 10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전쟁협력 외곽단체인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