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장원(長源), 호는 취부(醉夫)·성부(醒夫). 윤지득(尹之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언(尹訔)이다. 아버지는 정랑 윤시걸(尹時傑)이며, 어머니는 남순종(南順宗)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에 진사가 되고, 154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1546년(명종 1)에는 유구(琉球)에 표류하였던 박손(朴孫)의 경험담을 토대로 『유구풍속기(琉球風俗記)』를 저술하였다.
1548년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나, 시정기(時政記) 필화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安明世)의 정당함을 술자리에서 발설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진복창(陳復昌), 능성군(綾城君) 구사안(具思顔) 등의 밀고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수렴청정과 윤원형(尹元衡)의 세력확장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국문을 받던 중 옥사하였다.
동생 윤준(尹浚)도 윤원로(尹元老)의 죽음이 윤원형 형제의 싸움 때문이라고 말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1567년(선조 즉위년)에 복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