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흠

  • 역사
  • 인물
  • 대한제국기
  • 현대
일제강점기 때, 일본과 비행기불하교섭을 시도하여 일본 고관 사살과 주요 기관 폭격을 계획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상무상 등을 역임하다가 숙청된 비행사·관료·독립운동가.
이칭
  • 이칭이설(李契)
인물/근현대 인물
  • 사망 연도미상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904년(고종 41)
  • 출생지평안북도 박천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강진갑 (한양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일본과 비행기불하교섭을 시도하여 일본 고관 사살과 주요 기관 폭격을 계획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상무상 등을 역임하다가 숙청된 비행사·관료·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이설(李契). 평안북도 박천 출신. 일본에서 비행술을 배워 일등비행사가 되었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34년 6월 귀국 후 노동자와 연계하여 공산주의운동을 꾀하였다. 그리고 일본 육군비행기를 도입하여 일본요인을 사살하고, 관청을 폭격하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는바, 이는 중국에 있는 의열단과의 긴밀한 연락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일본과 비행기불하교섭을 하였는데, 이때 내세운 명목은 민간항공사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수상히 여긴 일본경찰의 조사에 의하여 윤공흠이 남경군관학교 출신임이 밝혀져 서울에서 잡혔다.

취조를 받던 중 남경군관학교 동기이며 의열단원인 김찬서(金燦瑞)·오용성(吳龍成)·김형렬(金亨烈) 등이 붙잡혀, 일본육군항공기를 불하받아 일제요인을 암살하려 하였음이 밝혀져서, 1934년 11월 동지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광복 후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내고 1952년 11월 재정상에 임명되었다. 1954년 3월 상무상에 임명된 뒤 1956년 4월 당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9월 상무상에서 해임된 뒤 1957년 8월 당중앙위전원회의에서 김일성(金日成)을 비판(8월 종파사건)한 연안파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숙청되었다.

참고문헌

  • - 『기려수필(騎驢隨筆)』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