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은중경변상도는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삽도 형식으로 묘사한 판화이다. 『부모은중경』은 불교 원전이 없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은 일반 서민이나 무지한 문맹들의 교화에 중점을 두었다. 우리나라 『부모은중경』의 현존본은 고려 말기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국역판 언해본이 유행하였다. 현재 50여 종이 조사되는데 모두 경전 내용을 형상화한 변상 판화를 지니고 있다. 그림의 내용은 다르지만 모두 부모 은혜의 막중함을 강조한다. 유교 사회에서 불교의 대사회적 기능 및 책임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본래 『부모은중경』은 범어나 팔리어(Pa-li語) 등의 불교 원전이 없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위경(僞經)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중국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서 불교의 사상적 내용을 중국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일종의 방편설로 풀이된다. 즉, 『불설효자경(佛說孝子經)』 · 『부모은난보경(父母恩難報經)』 · 『우란분경(盂蘭盆經)』과 같은 효에 대한 불경의 내용을 한문 문화권에서 수용하여 보완한 것이다.
이 경의 특색은 그 대상이 귀족 사회나 사대부 계층이 아닌 일반 서민, 또는 무지한 문맹의 교화에 중점을 둔 것이다. 따라서 서민들이 이 변상도를 지니는 것은 통례로 되어 있었다. 이 경의 성립연대는 중국의 수나라에서 당나라 초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존본은 고려 말기에 속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미 사경(寫經)과 같은 체재의 『부모은중경』이 유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250년(고종 37)으로 알려진 고려 사경, 또는 신라승으로 짐작되는 서명사(西明寺)의 체청(體淸)이 찬술한 『부모은중경소(父母恩重經疏)』 등에서 짐작된다. 다만 현존 최고의 판본은 1381년(우왕 7) 간행의 고려본이다.
그 이후 대부분의 『부모은중경』은 조선시대 전기에서부터 근세에 이르는 시기에 간행되었다. 현재 50여 종이 조사되었고, 개판 사찰은 수백에 달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이 경이 더욱 각광을 받았음이 확실하다. 이들은 한결같이 변상 판화를 지니고 있다.
그림의 내용은 시대나 판본에 따라 다소의 가감이 있고, 체재가 다르나 그 성격은 동일하다. 그 중에는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고 수백 명에 달하는 불도들의 발원에 의하여 개판된 것도 있다. 그러므로 유교 사회에 있어서의 불교의 대사회적 기능 및 책임을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국역판의 언해본이 유행하고 있어 더욱 이 경의 대중화 경향을 알 수 있다. 부모은중경변상도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수원 용주사에서 간행된 것으로 목판 · 석판(石板) · 동판(銅板)이 있다.
용주사는 정조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위한 능침사(陵寢寺)였기 때문에 『부모은중경』의 개판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이들 3본 부모은중경변상은 이곳에 전해지는 대웅전의 후불탱화와 함께 김홍도(金弘道)의 작이라고 전해지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판화의 구성을 개관하면 경의 서론격인 여래정례도(如來頂禮圖), 즉 여래가 왕사성에서 남쪽으로 가다가 고골(枯骨 : 죽은 뒤에 살이 썩어 없어진 뼈)을 만나 예배하고는 제자들에게 이 고골이 곧 전생의 부모일는지 모르기에 예배했다고 한 경설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필두로 하여 부모의 십중대은을 형상화하였다.
그 다음에 본문에 대한 각론과 같은 성격으로서 부모 은혜의 막중함과 함께 이 경의 인행 보시 공덕을 강조하는 그림 등 9폭을 첨부하는 것이 통례이다.
다만, 용주사 소장의 『부모은중경』은 마지막에 상계쾌락도(上界快樂圖)가 하나 더 첨부되어 22매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교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불교의 『부모은중경』은 곧 효의 보편적 개념에 대한 불교의 해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서민 경전으로정착하는 데 변상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