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

가야산
가야산
자연지리
지명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과 수륜면에 걸쳐 있는 산.
정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과 수륜면에 걸쳐 있는 산.
개설

주봉인 상왕봉(象王峯, 1,432.6m), 칠불봉(七佛峯, 1,433m)과 두리봉(1,133m)·남산(南山, 1,113m)·단지봉(1,028m)·남산 제1봉(1,010m)·매화산(梅花山, 954m)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 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와 그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환경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가 있는 치인리에 모이는 물은 급경사의 홍류동(紅流洞) 계곡을 이룬다. 그리고 동남방으로 흘러 내려와 가야면 황산리에서 낙동강의 작은 지류인 가야천이 된다. 가야산을 만드는 산맥을 보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덕유산(1,614m)에 이르러 원줄기는 남쪽의 지리산으로 향한다.

한편, 하나의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 대덕산(大德山, 1,290m)·수도산(修道山, 1,316m)과 단지봉(丹芝峯, 1,327m)을 거쳐 가야산에 이르러 크게 산세를 이룬다. 동쪽과 남쪽으로 낙동강 본류와 황강(黃江)을 굽어본다. 가야산 상왕봉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덕유산이,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멀리 보인다.

가야산 일대의 지질은 화강편마암 및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인사와 신촌락(新村落)이 있는 치인리골과 홍류동 계곡은 화강암침식곡이다. 《택리지》에서 우리 나라 산을 돌산과 토산으로 구분하고, 가야산을 예찬한 부분을 볼 수 있다.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의 가야산만이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 같으며, 공중에 따로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 골 입구에 홍류동과 무릉교(武陵橋)가 있다. 나는 듯한 샘물과 반석이 수십 리에 뻗쳐 있다.”라고 한 것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의 봉우리와 골과 천석(泉石)을 예찬한 것이다.

가야산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내어, 기온의 연교차·일교차가 매우 크다. 또, 해인사 일대는 고도가 높기 때문에 겨울에는 합천군의 1월 평균 평지기온 ·1.1℃보다 5℃ 이상 낮다.

강수량은 여름철 지형성 강우로 연강수량 1,100㎜ 이상이며, 하계집중현상 또한 높다. 홍류동 계곡과 해인사 일대 등 높이 1천m까지는 소나무와 전나무를 주종으로 한 3백 여종의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초본식물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정상 부근에 있는 매발톱나무·수수꽃다리·둥근정향나무·백리향의 군락은 특기할 식물이다.

동물상은 부엉이·꾀꼬리·꿩·산까치 등 1백 여종의 조류와, 멧돼지·너구리·산토끼 등의 포유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비단개구리 등 희귀 동물도 서식하고 있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명산’의 하나로 꼽혀왔다. 1966년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는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연봉과 능선은 동남방의 홍류동 계곡 쪽 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급사면을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쪽으로 마령(馬嶺)을 넘어 거창으로 가는 소로가 있으나 예로부터 주요 교통로가 동남방으로 홍류동 계곡을 끼고 내려와 합천군 야로면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명칭유래

가야산은 선사시대 이래 산악 신앙의 대상으로서, 고려팔만대장경판을 간직한 해인사를 품에 안은 불교성지로서, 그리고 선인들의 유람과 수도처로서 이름을 떨쳐왔다. 그런 이유로 가야산은 민족의 생활사가 살아 숨쉬는 명산이자 영산(靈山)이라 일컫을 만하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외에도 우두산(牛頭山)·설산(雪山)·상왕산(象王山)·중향산(衆香山)·기달산(怾怛山) 등 여섯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30).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三災 : 旱災·水災·兵禍)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가야산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먼저의 주장은 가야산이 있는 합천·고령 지방은 1,2세기 경에 일어난 대가야국의 땅으로, 신라에 멸망한 뒤로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렸다. 따라서, 이 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며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도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 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은 인도의 불교 성지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또, 이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하여 왔다.

즉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은 우두였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된 뒤 범어(梵語)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고, ‘가야산’은 불교 성지이므로 ‘가야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봉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결국 ‘가야산’이라는 명칭은 이 지방의 옛 지명과 산의 형상, 산악 신앙, 그리고 불교 성지로서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다.

해인사

가야산을 논할 때 해인사와 떼어 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지명에서부터 말하여 준다.

첫째, 가야산은 그 지명과 산신 전설에서 옛 가야 지방을 대표,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이 있는데, 가야산신은 정견모주라는 여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感應)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뇌질청예는 금관국(혹은 本伽倻라고도 함)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 하였다. 김수로왕의 건국 전설에는 가야의 북동 경계를 가야산으로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이른바 오가야 가야연맹의 맹주는 지금 가야산이 있는 고령군·합천군 일대의 대가야와 김해를 중심한 금관가야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가야 시대에 가야산은 낙동강 중하류 일대 가야 연맹의 성산(聖山)으로 산악 신앙의 대상이며,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 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 경내에 있었다는 정견천왕사는 가야산신의 사당이다. 또한 가야산 정상에서 근래까지 지내온 산신제는 옛 가야 지방의 신이 산악 신앙 형태로 잔존한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상징된다. 《택리지》에 가야산을 비롯한 열두 명산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무리들이 수양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하고, 또 “옛 말에 ‘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 하는데, 우리 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는 없으므로 무릇 이 열두 명산을 모두 절이 차지하는 바 되었다.” 하였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품에 안김으로써 거찰(巨刹)이 되었고, 가야산은 해인사를 옷자락 속에 둠으로써 더욱 명산·영산의 이름을 얻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라는 옛 기록은 바로 이를 말함이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대사찰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수차의 중흥이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었다. 애장왕의 보은 창건, 고려태조의 귀의(歸依), 조선태조의 발원(發願), 그리고 세종·세조·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다.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 유산인 고려팔만대장경판을 6백년 가까이 고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法寶宗刹)의 명성을 누리고 더욱 민족과 국가의 아낌을 받았다. 이러한 해인사의 흥창과 명성은 뛰어난 형승과 따를 수 없는 지덕을 가지고, 또 삼재불입(三災不入)의 영기(靈氣) 서린 가야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위란(危亂)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 전통의 중심지였다. 신라 말에서부터 시작된 해인사 승군(僧軍)의 전통은 희랑(希郎)이 군을 일으켜 고려 건국을 도운 것, 임진왜란에 승군 의병을 지휘한 유정(惟政)이 만년을 가야산에서 지내다 입적한 사적으로 이어진다. 또, 민족 항일기에 해인사는 청년 승려들이 중심이 된 독립 만세운동과 항일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셋째, 가야산은 최치원(崔致遠)의 은둔 이후 역대 문인들의 유람과 풍류의 이상향으로 그려졌다. 《택리지》에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生理)가 박한 곳이 많다. ……한낱 산수만 취하여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 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곳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생각이 날 때는 그 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하고 산수를 유람하는 뜻을 정리하였다.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듯, 가야산의 아름다움은 여러 사람에게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가야산의 수려한 석봉과 골짜기를 흐르는 계류가 사계절에 변화하는 주위 수목과 어우러져 선인들을 풍류에 도취하게 하였음이 틀림없다.

우리 선현들이 산을 유람하는 뜻이 단순히 풍류에서만 그치지 않았음이 정구(鄭逑)의 〈가야산기행문〉에서 뚜렷이 나타나 있다. 즉, 유람객의 구경거리가 되는 산의 훌륭한 경치는 인자(仁者)로 하여금 산의 오묘한 생성의 이치를 보고 자성(自省)하게 하는 것이며,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 넓히기를 위함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가야산 정상에 오른 심회를 “천 년 처사의 마음, 말 없는 가운데 합하네(默契千年處士心).”라고 읊었다. 최치원의 입산 이래 천 년 동안 수많은 선현들이 가야산을 유람하여, 혹은 바위에 새겨지고 혹은 문집에 남겨 전하는 시와 문장들에 의하면, 경승지를 유람하는 보다 깊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가야산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생활사를 통하여 고대 가야국의 산신이 있는 명산으로서, 법보종찰인 해인사를 품안에 안은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빼어난 경승을 자랑하는 유람처로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1)해인사가야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들지 않았으나 해인사는 임진왜란 후에 7차의 대화재를 겪어, 50여 동의 해인사 건물들은 대부분 2백 년 이내에 중건된 것들이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에 있다. 이 절은 화엄10찰의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종찰이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도량이기도 하다. 해인사는 802년(애장왕 3)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애장왕의 지원을 받아 창건하였다. 해인사 창건 기록인 〈가야산해인사고적기 伽倻山海印寺古籍記〉에 의하면, 순응과 이정은 중국에 가서 보지공(寶誌公) 문하에 불법을 구하였더니, 문도가 지공의 답산기(踏山記)를 주고 아울러 임종시의 말을 전하였다.

두 사람이 지공의 묘소를 찾아가 법을 청하니 수일 후 지공이 나와 설법을 하고 의발(衣鉢)을 전하며 간곡히 이르되, “너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가 환국하여 절을 창립하라.”하는 말을 들었다. 두 스님이 귀국하여 우두산의 동북쪽으로부터 고개를 넘어 서쪽 골에 이르러 보니, 합당한 곳이 있었으므로 풀을 깔고 앉아 수도하였다.

그 때 애장왕후의 등창병을 고쳐주자, 애장왕이 이에 크게 감사하여 먼저 봉서사(鳳棲寺 : 지금의 願堂庵을 말한다 함.)를 세웠다. 그리고 법당과 승료(僧寮) 40여 소를 짓고 전지(田地) 2천 5백 결을 하사하였다.

개산일(開山日)은 그 해 8월 16일(고적기에는 10월 16일)로 전한다. 화엄종의 개산조인 의상(義湘)의 법통을 이은 순응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인용하여 해인사로 명명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진성여왕이 죽은 애인을 위하여 해인사를 원당(願堂)으로 삼고, 자신도 왕위에서 물러난 뒤 해인사에서 지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태조는 후백제와 싸우다 해인사에 들어와 주지 희랑에게 구원을 청하니 희랑이 군을 일으켜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격파하였으므로, 태조가 전답 5백 결을 내려 절을 확장하도록 하였다.

조선 태조는 1398년 강화도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을 한양에 잠시 옮겼다가 뒤에 해인사에 봉안하고 세조는 대장경판각을 확장, 보수하였다. 1488년에는 왕명을 받은 학조(學祖)가 대적광전(大寂光殿)·대장경판각 등을 비롯하여 160여 칸의 건물을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후 모두 7차례의 화재가 있었으며, 그 때마다 중건 또는 중수하였다. 특히, 1817년의 대화재 때는 대장경판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 뒤 제월(霽月)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 건물로는 큰 법당인 대적광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명부전·삼성각·응진전(應眞殿)·조사전(祖師殿)·퇴설당(堆雪堂)·응향각(凝香閣)·관음전·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光樓)·경학원·명월당(明月堂)·사운당(四雲堂)·해탈문·국사단(局司壇)·봉황문·일주문(一柱門) 등이 있다.

가야산 내의 부속 사찰과 암자로는 청량사(淸凉寺)·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원당암(願堂庵)·삼선암(三仙庵)·금선암(金仙庵)·국일암(國一庵)·희랑대(希郎臺)·용탑선원(龍塔禪院)·길상암(吉祥庵)·지족암(知足庵)·보현암(普賢庵) 등 13개 사암(寺庵)이 있다. 또 해인사는 서부 경상남도 지역 합천·거창·산청·함양·진주 등 5개 군의 65개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또한 해인사에는 여러 국보, 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국보로는 해인사대장경판(국보 1962년 지정)과 해인사장경판전(국보 1962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보물로는 해인사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1963년 지정)·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1970년 지정) 등 3점이 잇다.

이 밖에 여러 사보(寺寶)들도 있다. 상탑향로(象塔香爐)·옥제가화(玉製假花)·희랑조사자조목상(希郎祖師自彫木像)·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봉황촛대·일영의(日影儀)·순은향로·옥등잔·숙종어필병풍(肅宗御筆屛風)·오채병풍(五彩屛風)·무공수정(無孔水晶) 등 2백 여점이 그것이다.

해인사 주변의 유적

(2) 해인사 주변의 유적

① 학사대(學士臺) : 응진전 서쪽에 있는 천년 고목으로 최치원이 심은 전나무라고 한다. 최치원이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② 외나무 다리 : 학사대 아래 계곡을 가로 질러 놓인 다리로 옛날 김천 사이에 보행 통로가 있을 때 일반 왕래객과 우마의 경내 출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한다.

③ 용탑선원 : 해인사에서 외나무 다리 건너 가야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다. 암자는 1945년에 창건되었고, 석굴암과 삼층석가사리탑이 있다. 삼층석가사리탑은 1965년고암(古庵)이 세운 것으로, 석가사리를 봉안하였다. 1971년 역시 고암이 건립한 석조미타굴 법당에는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음보살 및 세지보살(勢至菩薩)을 모셨다.

④ 용성선사사리탑(龍城禪師舍利塔) : 용탑선원과 홍제암 사이에 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용성대선사(속명 白相奎)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1941년에 건립하였다. 용성의 비석이 함께 있다.

⑤ 홍제암 : 용탑선원 아래에 있다. 유정이 3년 간 머물다가 입적한 곳으로,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의 시호를 따서 홍제암이라 한다. 1770년(영조 46)해봉(海峰)이 중건하였고, 현 건물은 1979년에 중수한 것으로 단층 H자 목조로 웅장한 규모이다. 영자각(影子閣)에는 유정과 휴정(休靜) 그리고 영규(靈圭)의 상을 모셨다. 2000년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⑥ 사명대사비 및 부도 : 비문은 당대 문장 허균(許筠)이 짓고, 1612년(광해군 4)에 건립하였다. 1943년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가 부수어 버린 것을 1958년 조각을 모아 다시 복원하여 옛 자리에 세웠다. 이 비와 부도는 1976년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옆에 신비(新碑)와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가 있는데, 아무런 글이 새겨져 있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⑦ 원당암 : 해인사 서쪽 비봉산 기슭에 있다. 신라애장왕이 해인사를 창건할 때 여기에 먼저 봉서사를 짓고 정사도 함께 본 곳이라 한다. 1852년(철종 3) 중건 이후 퇴락한 것을 1971년혜은(彗恩)이 새롭게 중건하였다.

개창 당시 왕이 이 곳에서 정사를 살핀 것과 관련, 산너머에 삼정승이 살던 ‘삼정(三政)마을’과 말을 기르던 ‘마장동(馬場洞)’, 극락전 동쪽에는 ‘어수정(御水井)’, 절 앞에는 ‘옥가평(獄街坪)’ 등의 이름이 전한다. 경내에 1970년에 보물로 지정된 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이 있고, 원당·보광전(普光殿)·염화보(拈花寶) 등의 건물이 있다.

⑧ 금선암 : 해인사 서남쪽 개울가에 있다. 1945년 비구니 하담(河淡)이 세운 여승방이다. 개울가에 있어 불교 학생 수련장으로 이용된다.

⑨ 삼선암 : 금선암 바로 아래에 있다. 1893년 자홍(慈洪)이 창건하여 학사대 북쪽에 있던 것을 옮긴 여승방이다. 1904년 보찬(普讚)과 지종(智宗)이 증축하고, 1971년 혜안(慧眼)이 중건하였다. 뒤에 삼선봉(三仙峰)이 있어 삼선암으로 이름지었다.

⑩ 보현암 : 해인초등학교 뒷산 기슭에 있는 옛 옥가평 자리에 비구니 혜춘(慧春)이 1975년 창건한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선방이다. 약수가 있으며, 수조(水槽)가 아름답다.

⑪ 약수암 : 일주문이 있는 큰길에서 동쪽으로 100m 거리에 있다. 밭 가운데에서 약수가 솟는다고 하여 약수암이라 하였다. 1904년 비구니 성주(性主)가 창건, 1927년 도삼(道三)이 중건, 1972년 법공(法空)이 선원을 지었다. 비구니들의 수도장이다.

⑫ 국일암 : 약수암 뒤에 있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37년(인조 15)·1942년·1948년에 중건하였다. 벽암(碧巖)이 머물렀던 곳으로, 병자호란에 승병 3천을 일으키니 왕이 ‘국일도대사(國一都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부휴(浮休)·고한(孤閑)·벽암의 부도가 있다.

⑬ 희랑대 : 국일암 뒤 산 중턱 절벽에 암자를 지었다. 927년(태조 10)희랑이 건립, 수도하던 곳으로, 1940년 현옹(玄翁)이 중건하였다. 이 곳 삼성전에 모신 독성나반존자(獨聖那畔尊者, 또는 獨修聖)의 영험은 많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⑭ 지족암 : 1796년(정조 20)관수가 세운 것으로 전한다. 삼성전 뒤에 있다. 원래 도솔암(兜率庵)이라 하였는데, 1893년(고종 30)환운(幻雲)이 중건하고서 지족암으로 바꾸었다. 희랑의 기도처라는 설도 있다.

⑮ 백련암 : 일주문 동쪽 약 1㎞ 지점에 있다. 해인사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주위의 암봉(巖峰)과 전망이 좋아 경치가 뛰어났다. 좌우로 용각대(龍角臺)·절상대(絶相臺)·환적대(幻寂臺)·강선대(降仙臺) 등의 기암이 있고, 뜰에 박힌 한덩이 거암이 부처의 얼굴과 같아 불면석(佛面石)이라 부르며, 영구천(靈龜泉)이 있다.

창건 시기는 미상이나 휴정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때 해인사를 보전한 소암(昭庵)이 중건하였으며,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암자이다. 지금은 조계종 종정 성철(性澈)이 머물고 있다. 현재 원통전(圓通殿)·영자당(影子堂) 및 요사(寮舍)가 있다.

극락전 : 창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488년(성종 19)에 부휴가 중건하였다. 부휴 외 10인의 영정을 모셨다. 합천치인리마애불입상 : 해인사 뒤 가야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 옆에 있다. 큰 바위를 광배(光背)로 하여 조각된 높이 7.5m의 거대한 마애불이다. 이 불상은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해인사석조여래입상 : 가야산 정상 부근 칠불암 터에 있는 높이 2.1m의 불상으로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파손이 심하다.

길상암적멸보궁(吉祥庵寂滅寶宮) : 1972년영암(暎巖)이 창건하였다. 천불동 낙화담 서쪽 거북바위 옆 큰 산봉우리에 부처님 진신사리 2과(顆)를 봉안하고, 묘길상적멸보궁천진보탑(妙吉祥寂滅寶宮天眞寶塔)이라 이름하였다. 또 타이의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주위 경치가 아름다워 기도처로 유명하다.

청량사 : 가야산 어귀 매화산 기슭에 있는 해인사의 말사이다. 신라 시대에 창건된 절로 《삼국사기》 열전에는 최치원이 합천 청량사에서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대웅전은 근래 해체, 보수한 것이며, 석등·석탑·석가여래좌상 등 통일 신라 시대 작품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량사석등 :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4m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 석등이다. 8각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간석(竿石)의 변화와 옥개석의 경쾌한 모양이 돋보인다.

청량사석조석가여래좌상 :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좌높이 2.1m, 대좌높이 75㎝이다. 장방형의 좌대 위에 앉은 석가여래좌상인데, 경주석굴암 본존불을 연상하게 하는 불상이다. 불상과 대좌, 광배가 모두 우수하여 8세기의 석굴암에 대하여 9세기를 대표하는 불상이라 할 만하다.

청량사삼층석탑 :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4.85m이다. 2중기단 위의 삼층석탑으로서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의 양식이며, 매우 정교하고 우아한 가작이다.

(3) 없어진 사찰

《신증동국여지승람》 혹은 정구의 〈가야산기행문〉에 기록이 있으나 19세기 읍지에 없다고[今無]하였으며, 지금도 중창되지 않은 절은 내원사(內院寺)와 소리암(蘇利庵)이다. 내원사는 해인사 북쪽 2㎞ 지점에 있었으며, 절에서 남쪽으로 수백 리 멀리 지리산의 중첩한 푸른 모양이 보였다는 점으로 보아 산정이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절에 조현당(釣賢堂)·나월헌(蘿月軒)·득검지(得劍池)가 있었다. 서거정(徐居正)·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의 시문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 殊異傳》에 “동방에 옛적에 소리암이라는 큰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서거정이 중창기를 썼으며, 김굉필이 독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정각암(淨覺庵)·성불암(成佛庵)·심원암(深源庵)·원명사(圓明寺)·총지사(叢持寺)·도은사(道恩寺) 등의 암자가 정구의 기행문에 나타난다.

문헌에 나타난 가야산

명산·유람지로서 가야산을 기록한 많은 시문(詩文)은 최치원의 가야산 입산에서부터 나타난다. 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시인·문장가로서 우리 나라 한문학의 조종으로 칭송되거니와, 신라의 기울어짐을 보고 은퇴하여 명승지를 유람하며 한거자적(閑居自適)하다가,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속에 은둔한 뒤로는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에서 “어느 날 고운(최치원)이 아침 일찍 집문을 나선 뒤로는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했으며, 갓과 신만이 숲속에 남아 있었으니, 아마도 신선이 되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중들이 그 날로 명복을 빌게 되었다.”고 하였다.

최치원은 〈해인사묘길상탑기 海印寺妙吉祥塔記〉를 찬술하기도 하였는데, 이 기문은 전몰한 승려에 대한 진혼문(鎭魂文)으로서 승군의 전통이 신라 시대까지 소급함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가족을 데리고 들어가 살던 곳을 치원촌(致遠村)이라 하였는데, 후에 치인촌(治仁村)이 되고 다시 지금의 치인리가 되었다.

그러나 최치원의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홍류동 계곡의 제시석(題詩石)이다. 최치원이 바둑을 두던 곳[碁閣]이라고도 하는데, 치원대(致遠臺)로도 불리는 바위에는 최치원의 〈가야산독서당시〉가 새겨져 있다.

〈농산시 籠山詩〉라고도 불리는 이 시는 마멸되어,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로 다시 새겨져 있는데, “첩첩한 돌 사이로 미친 듯 내뿜으며 겹겹한 산을 두드리니, 사람의 소리는 지척간에도 분간하기 어렵도다.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 들릴까 저어하여,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둘러 막았네.”라고 되어 있다.

그로부터 6백 년 뒤에 김종직이 답하여 “맑은 시의 광염(光燄) 푸른 멧부리를 쏘는데, 먹 흔적은 닳아서 희미하구나. 세상에선 다만 시해(尸解)되어 갔다 하나, 무덤이 공산에 있는 줄이야 어찌 알리요.”하였다. 조선 시대에 가야산은 많은 유학자·문인들이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이들은 최치원의 행적을 흠모하고 가야산의 절경을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세종 때 문신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가야산 좋단 말 십 년 동안 듣기만 했네. 내가 오니 구름이 짝이 되고 중이 누웠으니 사슴이 벗하네. 손의 베갯머리엔 차가운 시냇소리 맑고, 향반(香盤)엔 고요한 밤 깊었구나. 다생(多生)을 고화(膏火) 속에 괴로워 하던 것, 왜 이다지도 부끄러운가.” 또, 배중부와 김일손도 가야산에 관련한 시문을 남겼다. 배중부(裵仲孚)는 해인사로 가는 친구를 전송하면서 가야산의 사계절을 노래하였다.

김일손의 〈내원사조현당기 內院寺釣賢堂記〉에 “가야산에는 반드시 경치가 기절하여 신선이 머물렀던 것이리라. 문창(文昌 : 최치원의 시호)이 간 뒤에도 반드시 높은 사람과 은사(隱士)가 그 산중에서 서식하였을 것인데, 혹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음인가. 한번 유람하여 그 사람을 탐문하려고 하였다.”고 하여, 은사를 찾아 가야산을 유람함을 밝혔다. 정구 또한 가야산의 절경을 기리는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가야산기행문〉에서 가을철 가야산 사인암(舍人巖)의 경치를 묘사하고 있다.

(1) 무릉교(武陵橋) : 이 다리는 가야산 홍류동계곡 입구에 있었는데, 지금은 수재로 없어졌다. 김종직의 시에 “그림 같은 무지개 다리 급한 물결에 비치는데,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 발을 조심한다. 나의 옷 걷고 물 건너려는 것, 그대는 웃지 마소. 고운(최치원)이 어찌 위태로운 길 밟았던가.”하였다.

(2) 홍류동 : 가야산의 많은 계곡 중에 가장 이름난 곳으로, 무릉교에서 치인리까지 10여 리의 계곡이다. 높은 절벽과 봉우리 밑 골짜기의 흰 돌 계곡을 맑은 물이 흘러 기이한 경치를 이룬다. 울창한 송림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봄에는 양쪽 언덕의 진달래·철쭉꽃에, 가을이면 단풍에 붉게 물든다고 홍류동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 여름철에 계곡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마치 금강산 옥류천(玉流川)을 닮았다고 옥류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의 가야산국립공원관리소 조금 위에 ‘고운최치원둔세지(孤雲崔致遠遯世地)’라는 비석이 있는 곳에 제시석(題詩石)이 있고, 그 계곡 가운데 농산정(籠山亭)이 송림·계곡과 함께 어우러져 그림 같은 정경을 자아낸다.

김종직의 시에 “아홉 굽이 흐르는 물 우뢰처럼 부딪치니, 낙화가 수없이 물결 따라 오누나. 반생 동안 도원(桃源)길에 올랐으나, 오늘에야 비로소 물색(物色)의 시기(猜忌)를 만났구나.”하는 글이 있다. 농산정 부근에 최치원의 사적이 모여 있는데, 계곡 건너 길가에 최치원의 사당인 학사당이 있다.

원래 치인리에 있었다 하나, 풍우에 없어진 것을 후손이 근래에 이 곳 홍류동에 이전하여 영정을 모셨다. 영자각이라고도 한다.

(3) 가야서당(伽倻書堂) :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으로, 1937년에 사림과 후손이 창건하였다. 학사당 옆에 있다.

(4) 문창후유적비(文昌侯遺蹟碑) : 근래에 세운 것으로, 학사당 앞에 있다. 홍류동 계곡을 거슬러 올라 가면서 가파르고 우뚝한 절벽과 봉우리, 기이한 바위, 그 사이로 쏟아져 흐르는 폭포와 연못이 곳곳에 절경을 이루고, 그 중에는 경승의 이름이 바위에 크게 새겨져 있는 것이 많다.

특히 널리 알려진 것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체필암(泚筆巖)·취적봉(吹笛峰)·음풍뢰(吟風瀨)·낙화담·회선암(會仙巖)·첩석대(疊石臺)·분옥폭(噴玉瀑)·제월담(霽月潭)·완재암(宛在巖) 등이 그것이다.

강희맹이 가야산을 유람하다가 음풍뢰·체필암에 이르러 봉우리가 사방에 우뚝하고 급한 물결이 바람을 뿜어서 소리가 전진(戰陣)의 말[馬]과 같으며, 커다란 돌이 시내에 임하였는데 이끼가 끼지 않고 미끄럽기가 갈아놓은 것 같아 붓으로 글씨를 쓸 만하다 하여, 물은 음풍뢰, 바위는 체필암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또, 음풍뢰 시에 “뿜는 물방울은 뛰는 구슬이 급하고, 놀란 물결은 주름진 비단이 깊다. 바람맞이에서 볼수록 부족한데, 웅덩이 밑에는 용이 있어 읊조리네.”하였고, 체필암 시에 “쇠로 깎은 듯 천길이 장하다. 구름이 피어나니 일만 구멍이 서늘하다. 아는 것 없이 다만 우뚝 선 것이 창창(蒼蒼)하기만 할 뿐”이라 하였다.

(5) 용문폭포(龍門瀑布) : 치인리 신촌락에서 서쪽으로 2㎞ 되는 곳에 있는 큰 폭포이다. 용이 살았다고 해서 용문폭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현황

가야산이 있는 합천군 가야면을 중심으로 성주군과 거창군의 일부를 포함한 총면적 57.8k㎡가 1972년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주요 관광 자원은 홍류동을 비롯한 계곡과 해인사 일대, 그리고 가야산연봉·능선의 자연 경관으로 나누어진다. 자연 경관과 문화적·역사적 경관이 뛰어난 조화를 이루었다.

관광객을 위한 편의 시설은 치인리 신촌락에 집중되어 있다. 신촌락 집단 시설지는 여관을 비롯한 숙박 업소와 식당 및 기타 위락 시설과 기념품 상가가 밀집하여 있으며, 산채요리·버섯 요리가 일미이다.

우체국(국제전화 취급)·농업협동조합(외국환 취급)·경찰지서·주차장(7천㎡) 등 공공 시설물도 갖추어져 있다. 교통은 서울·부산·대구·마산·진주·합천간에 정기 노선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특히 대구와는 88올림픽고속도로(현 광주대구고속도로) 건설 이후 1시간으로 단축되어, 대구 시민의 일일 휴양지로 되었다.

1972년에 건립한 전망대가 있어 가야산 정상과 해인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추풍령을 넘어 김천시 증산면·성주군 수륜면·홍류동으로 들어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은 맑은 계곡을 끼고 있으며, 〈무흘구곡 武屹九曲〉으로 유명한 절경이 펼쳐진 길이다.

또한, 청암사·수도암에도 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륜면의 회연서원일대의 절경도 일품이다. 등산길로는 사하촌인 여관촌에서 해인사·용탑선원·정상의 왕복 코스(편도 약 6㎞)와 마애불 갈림길 능선·대피소·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해인사·마애불·정상 등의 길이 있고, 성주 쪽에서는 창천·만귀정·정상의 길이 있다.

상왕봉 정상에 서면, 두리봉·단지봉·수로산·대덕산을 거쳐 덕유산에 이르는 서쪽의 대능선이 장쾌하다. 또한, 정상에는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우비정(牛鼻井)이 있으며, 성주군이 동북쪽으로 내려다 보이고, 백련암과 가산(加山, 692m) 쪽으로 뻗은 남북 능선과 남산제일봉 바위 능선의 기암 절벽이 또한 절경을 이룬다.

가야면과 인접 야로면은 예로부터 백토(白土)와 자기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으며, 가야면의 고려도기회사(高麗陶器會社) 등의 도자기는 합천군의 주요 공산품이다.

가야면과 인접한 고령군 쪽의 가야산 산록에도 고령토광산이 많다. 가야산이 있는 합천군에는 함벽루(涵碧樓)·연호사(烟湖寺)·대가야 성터·황계폭포(黃溪瀑布) 등 많은 고적·관광지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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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택리지(擇里志)』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역사산책』(이규태, 1986)
『한국의 여로』9 지리산(한국일보사, 1986)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가야산해인사』(우진문화사, 1985)
『한국지지』지방편 Ⅲ(건설부국립지리원, 1985)
『한국의 발견』(경상남도, 뿌리깊은나무, 1983)
『합천군지』(합천군지편찬위원회, 1981)
『월간 산』(조선일보사, 1981.1.)
『한국명문선』2-명산기행문-(민족문화추진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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