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大興寺) 13대강사(大講師) 중 10번째이다. 성은 김씨, 자는 삼여(三如), 호는 완호(玩虎). 13세에 두륜산(頭輪山) 대흥사로 출가하여 서목(瑞目)의 제자가 되었고, 17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백련(白蓮) 밑에서 불경을 배워 의발(衣鉢)을 전해받았다.
1795년(정조 19)일봉암(日封庵)에 있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1797년부터는 대흥사 청풍료(淸風寮)에서 개강하여 강원을 이끌었는데, 항상 100여 명의 학인들이 지도를 받았다.
1811년(순조 11) 2월 24일 대흥사에 불이 나서 세 전각만을 남기고 아홉 전각이 모두 소실되자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812년 5월 극락전·용화당·지장전 등을 중건하였다. 1813년 천불전을 짓고 전내에 천불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주 기림사로 가서 6년 동안 경주 옥석으로 천불을 조성하였다.
불상이 완성되자 1817년 10월 23일 3척의 배에 싣고 대흥사로 향하였는데, 그 중 그가 탄 배가 오륙도 앞바다에서 표류하여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닿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절을 짓고 옥불을 봉안하려 하는데, 꿈에 이 불상들이 나타나서 해남 대흥사에 봉안될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1817년 6월 일본을 출발, 그 해 8월 15일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뒤 대흥사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나이 69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제자 중에서 덕행(德行)으로는 성묵(聖默)·호의(縞衣)·하의(荷衣)가 손꼽혔으며, 언변으로는 환봉(煥峰)·중화(中和)·영서(靈瑞)가, 정사(政事)로는 설암(雪巖)과 치완(痴玩)이, 문학으로는 화담(華潭)과 초의(草衣)가 손꼽혔는데, 마치 공자(孔子)의 4과(科) 10철(哲)과 같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