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군자감정, 형조참의, 동지중추부사,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징원(澄源)
백촌(栢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8년(선조 1)
사망 연도
1648년(인조 26)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군자감정|형조참의|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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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군자감정, 형조참의, 동지중추부사,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징원(澄源), 호는 백촌(栢村). 이목(李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세장(李世璋)이다. 아버지는 좌승지 이철(李鐵)이며, 어머니는 사직서령(社稷署令) 목심(睦諶)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에 부임하였다. 1599년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시강원설서를 거쳐 1600년 형조·예조·호조의 좌랑,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602년 장령, 1607년 공조·호조·예조의 정랑, 성균관전적, 세자시강원문학·필선을 역임하였다. 1608년에는 성균관직강 등을 거쳐, 광해군 때에 수찬·부교리·종부시정·군자감정 등의 내직과 안산군수·함경도도사 등의 외직을 거쳤으며,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폐모론에 반대하던 이항복(李恒福)을 처벌하지 못하게 항쟁하다가 파직되었다.

4년 뒤 문천군수가 되었고, 인조반정 후에는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치고,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왕을 호종하여 공주에 갔다온 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계되었다. 그러나 다른 관료들의 시기가 있어 중앙에는 진출하지 못하고 고산(高山)·선산·청송 등으로 나갔다.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돌아온 뒤, 형조참의·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다. 1647년(인조 25)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계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광해군 때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평탄한 관료생활을 하였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 저서로는 『강목주설(綱目註說)』·『가례소의(家禮疏義)』·『동국편류(東國編類)』 등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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