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오랫동안 지속시켜왔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사회신분이나 경제적 부(富)가 관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관직의 토속어인 벼슬은 한국인들의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한국인들이 벼슬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벼슬은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작(爵)·훈(勳)·관(官)이 그것이다. 작은 주(周)나라 봉건제의 유제(遺制)이고, 훈은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명예직이며, 관은 동양적 관료제에 바탕을 둔 지배자군(支配者群)을 의미한다.
작의 기원은 주나라 봉건제로 소급된다. 작의 어원은 예기(禮器)인 술잔이었다. 제후들이 천자 앞에 모였을 때 술잔을 돌리는 순서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칭이 생겼고, 사작(賜爵)의 습관에서 작위(爵位)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1) 봉작제
봉건제는 작과 녹(祿) 두 종류의 계급을 골격으로 삼고 있었다. 작은 지방의 자치적 소국가(小國家)의 군주(君主)들 사이의 위계(位階)였다. 그 등급은 천자와의 친소(親疎), 봉토(封土)의 대소, 인민(人民)의 다과 등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편 각국의 군주는 자기 영내(領內)의 인민을 지배하기 위해 친척·신하 및 유력자들을 경(卿)·대부(大夫)·사(士) 등의 관료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봉사의 대가로 자신의 봉토·인민의 일부를 나누어주기도 하고, 혹은 곡물을 급료로서 지급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녹이다. 제후의 위(位)는 작이고, 경·대부·사의 위는 녹이며, 서민의 위는 없었다.
그러나 진(秦)·한(漢)시대에 관료제가 발달함에 따라 작의 기능과 의미가 달라졌다. 즉 작은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이나 일반서민들에게도 주어지게 되어 봉작제(封爵制)는 유명무실한 명예직으로 된 것이다.
황제는 사작제(賜爵制)를 통해 신민(臣民)을 개별적·인신적으로 지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작의 기능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속에 용해, 변질되어갔다. 봉건제에서 봉작을 세습하던 것이 관직을 세습하는 세관제(世官制)와 수조지(收租地)를 세습하는 세록제(世祿制)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제도가 실시된 대표적인 예는 당(唐)나라의 정치제도이다. 고려와 조선 전기에도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세관제로서의 음서제(蔭敍制)와 세록제로서의 전시과(田柴科)·과전(科田)이 주어졌다. 신라시대에는 오히려 봉건제에 가까운 식읍(食邑)과 녹읍(祿邑)이 주어졌다.
(2) 봉군제
주나라 때에 작은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다섯 가지가 있었다. 고려 초기에 왕족들에게 원군(院君)·대군(大君) 등의 칭호가 주어졌고, 현종 때부터 공·후·백이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298년(충렬왕 24)부터 봉군제(封君制)가 실시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봉작제에서 봉군제로의 전환은 그들에 대한 대우의 변화를 수반하였다. 과거에는 관료층과는 별도의 지위를 누리던 왕족(駙馬 포함)들이 이제는 문·무관들과 같이 관료체계 속에 소속되게 된 것이다.
또한 이성귀족(異姓貴族)들도 처음에는 공·후·백·자·남을 쓰다가 충선왕 때 제군(諸君)·원윤(元尹)·정윤(正尹)을, 1356년(공민왕 5)에 공·후·백을, 1362년에 부원군(府院君)·제군을 썼다.
조선 초기에도 잠시 공·후·백을 썼으나 뒤에 후·백은 없어지고, 시호(諡號)로서 공만 쓰여 왔다. 왕족도 5세대가 넘어 친진(親盡: 제사를 받드는 대수가 다 된 것)이 되면 문·무관과 같은 지위로 떨어지며, 고려 말 조선 초까지 봉군되었던 부마(駙馬)들도 1444년(세종 26)부터 문산계(文散階)인 의빈계(儀賓階)를 받게 되었다.
작과 비슷한 벼슬로 훈(勳)이 있었다. 훈의 어원은 황실의 문향소옥(門香小屋)인 혼(閽)에 있었다. 따라서 훈관(勳官)은 관료제의 발달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훈관은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수(隋)·당대에 이르러 제도화되었다.
훈은 처음에는 산관(散官)에 지나지 않았으나 당대에 이르러 훈관을 두게 된 것이다. 훈관은 애초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수여되었다.
사족(士族)은 유내(流內)인 품관(品官)을 지녔지만 서민은 유외(流外)인 훈위(勳位)에 취임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귀족들에게까지 주어져 훈관 혹은 훈품(勳品)은 지극히 존귀하고 영예스러운 벼슬로 되었지만 직사(職事)는 없었다.
고려 시대에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훈관으로서 검교직(檢校職)과 동정직(同正職)이 있었다. 이 직제는 정직체계와는 별도로 설치되었던 산직체계이었다.
(1) 검교직
검교직은 본래 3사(三師: 大師·大傅·大保)·3공(三公: 大衛·司徒·司空)과 같은 고위 관직에 설치되었던 훈직이었는데, 중기 이후로 점차 수급대상을 넓혀 참하직(參下職)과 내시직(內侍職)에까지 주어졌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검교직은 소멸되어가는 동정직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산직(散職)으로 활용되었다. 이에 권위가 떨어져서 양반 뿐 아니라 향리(鄕吏)·백성 등의 피역(避役) 수단으로 이용될 정도로 천직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직(正職)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정한 전시(田柴)와 녹봉(祿俸)이 주어졌다. 물론 과전법(科田法)에 있어서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외에 과전을 받는 것은 없었으나 녹봉은 계속 받고 있었다.
1416년(태종 16)에 일반검교직이, 1443년(세종 25)에 내시부검교직(內侍府檢校職)이 없어진 것도 이 녹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녹봉이 주어지지 않는 무록검교직(無祿檢校職)만 남게 되었다.
검교직에 녹봉과 과전이 없어지고 훈직으로서의 성격이 약화됨에 따라, 검교직은 늘어나는 관직수요를 충족시켜주는 허직(虛職)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2) 동정직
당나라의 원외랑 제도(員外郎制度)와 동정원 제도(同正員制度)를 본떠서 만든 동정직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려 성종 때부터 실시되었다.
고려 왕조는 지방의 반독립적인 호족(豪族)세력을 중앙관인(中央官人)으로 흡수하기 위해 많은 관직이 필요하였다. 검교직과 아울러 동정직이 설치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의 동정직과 검교직은 훈관의 성격을 띠면서 정직체계(正職體系)와는 별도로 하나의 일관된 산직체계(散職體系)를 이루고 있었다. 즉, 문반(文班) 6품 이하와 무반(武班) 5품 이하에 설치된 산직을 동정직, 문반 5품 이상과 무반 4품 이상에 설치된 산직을 검교직이라 하였다.
동정직에는 본래 토지와 녹봉이 지급되기로 되었던 듯하나 실제로는 지급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 참하관직(參下官職)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입사직(初入仕職) 및 음직(蔭職)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벼슬하는 사람이나 음직을 받는 사람은 처음부터 실직(實職)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선 동정직을 받아 결품(結品)한 다음에 실직도 받고 품계(品階)도 올려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이들의 실직으로의 진출이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다. 여기에 이들에 대한 취재시험(取才試驗)이 발달하게 되었다.
동정직을 가진 자는 일정한 임용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실직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동정직은 고려 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조선 태종조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즉 조선 초기에 이르러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귀족적인 성격을 띠는 동정직·검교직과 같은 훈관은 소멸되었다.
벼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관(官)이었다. 관은 진(秦)·한(漢) 이후에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발달함에 따라 가장 보편적인 벼슬의 명칭으로 쓰여 왔다. 관의 어원은 한대(漢代)의 노예에 해당하는 신첩(臣妾)에 있었다.
(1) 신과 첩
신(臣)은 복어(僕圉: 馬丁)·서미(胥靡: 側近의 小姓)·격경(擊磬: 樂手) 등 가내 노예적 직업에 종사하던 측들로서 농사를 지은 예는 없다.
유력자(有力者)가 많은 신을 거느리고 있을 때, 신은 주군(主君)의 측근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법제적인 지위는 매우 낮았지만 주군 측근에서 조직화된 집단을 형성해 주군의 조아(爪牙)로서 주군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중국 고대의 관료는 이들 신집단(臣集團)에서 발생한 것이다. 신(臣)·관(官)·환(宦) 세 글자는 서로 상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관료가 노예인 신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재상(宰相)·복야(僕射)·시중(侍中) 등 고위 관료의 직업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재(宰)는 요리사였고, 상(相)은 왕에게 면복(冕服)을 입히는 노복(奴僕)이었으며, 복인(僕人)과 야인(射人)은 군주의 측근 환관(宦官)이었고, 시중도 환관으로서 천인이었다.
신집단은 군주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권력이 강해졌고, 이에 노예 아닌 자도 자진해서 신이 되었다. 이들도 일단 신이 된 이상 군주에 대해 노예적인 봉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새로운 지배와 복종의 군신관계가 성립되었다.
이들은 군에 대하여는 신이었지만 새로운 사회적인 지위가 인정되어 관으로 불리었고, 일반민보다 상위에 있는 특권계급으로 되었다. 물론 관이 될 수 있는 것은 일부였고, 나머지는 그대로 노예로 남아 있었다.
첩(妾)도 처음에는 노예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시침(侍寢)의 의미는 없었다. 춘추시대에는 부처(副妻)로서 잉(媵)이 있었고, 첩은 여자노예일 뿐이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귀족이 몰락하고 전제군주권이 신장되면서 일반민 중에 부유한 자가 부처를 삼을 목적으로 여자노예를 구입하였다. 이들을 복첩(僕妾)이라고도 하였다.
신과 첩은 모두 노예였으며, 부부(夫婦)가 아니고 전혀 별개로 주군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관료가 노예였던 신첩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군주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봉사와 복종이 요구되었다.
(2) 관품과 관등
관에는 관품(官品)과 관직이 구분되어 있었다. 관품은 관리의 위계이며, 관직은 관리의 직사였다.
관품의 기원은 한(漢)나라에 관질(官秩)을 나타내는 세록(世祿)의 석수(石數)로 소급된다. 석수로 나타난 질(秩)의 순서, 즉 질서가 관품의 상하관계가 되었다. 따라서 질의 차이는 단순한 급여의 차이만이 아니라 관품적 기능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후대에는 질이 관품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진(秦)나라 이후에 관품이 정해지자, 토지·녹봉·식객(食客) 등이 관품에 의해 지급되었다. 관리들에게 녹봉 이외에 토지와 식객을 준 것은 관료제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이에 시대가 지날수록 관리들의 직접적인 전호(佃戶)지배를 배제하고, 녹봉과 약간의 직전(職田)을 주는 데 그치고 그나마 직전은 종국에 가서 없어지게 되었다.
관의 등급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품(品)·급(級)·계(階)·자(資)·질(秩) 등이 있었다. 중국에서 관등을 아홉 개의 등급으로 나눈 것을 품, 품을 다시 정(正)과 종(從)으로 구분한 것을 급, 급을 다시 세분한 것을 계라 하였다.
계와 자는 같은 것이었고 이 모든 관등을 총칭해 질이라 하였다. 고려·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으나 급은 많이 사용되지 않았으며, 계나 자에 매몰되었다. 따라서 계급(階級)·자급(資級)이라는 말은 쓰였어도 급만 따로 쓰인 예는 많지 않았다.
계와 자는 같이 쓰였지만(階窮을 資窮이라고 한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구분해 본다면 계는 관계·품계·계급 등 계층의 지위를 말할 때 많이 썼고, 자는 가자(加資)·증자(增資)·초자(超資) 등 관등을 올려줄 때 많이 썼다.
품이 구체적인 관등으로 시행된 것은 위(魏)나라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혹은 九品官人法)부터이다. 이는 각 군국(君國)의 중정(中正)이 그 지역의 인사(人事)를 품등(品等)해 향품(鄕品)을 주고, 중앙에서 관리를 채용할 때 향품에 대응해 관품을 주는 제도이다.
이 때 관품은 초임향품(初任鄕品)보다 4등급을 낮추어 주었다. 그 뒤 후위(後魏) 때에 9품을 다시 정과 종으로 나누어 18급(級)으로 늘렸다. 이것이 중국과 한국의 관계의 기본모형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관등제도가 있어왔다. 고구려의 12관등, 백제의 16관등, 신라의 17관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백제 관등의 최고위인 1품관(一品官: 고구려의 大對盧, 백제의 佐平)은 중국의 정4품에 해당하였다.
신라는 중국의 정4품에 해당하는 6위(位) 아찬(阿飡)에다가 5등급을 더 올려 최고위인 1위 이벌찬(伊伐飡)을 중국의 정1품에 맞먹도록 하였다.
이것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도쿠 천왕[皇德王]의 대화(大化) 3년(647) 신관위제(新冠位制)에 종래의 최고위였던 대덕(大德)이 중국의 정4품, 즉 대부(大夫)의 위(位)에 해당하던 것을 그 위에 대직(大織) 이하 6등급을 더해 대직이 당나라의 정1품에 비견되도록 하였다. 신라와 일본의 경우 후진국이지만 중국과 대항해 독자적인 관등제를 갖추려고 한 의식이 역력하다.
(3) 관계
신라의 관등제는 그 뒤 태봉의 관계와 고려 초기의 관계로 계승되었다. 그러다가 995년(성종 14)에 당나라의 관품령(官品令)을 모방해 중국식 문·무산계(文武散階)를 실시하였다.
이 때의 문·무산계는 18품(品) 29계(階)였다. 여기에는 3품 이상은 단계(單階)이고, 나머지는 쌍계(雙階)이며, 2품 이상의 무산계명(武散階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무산계는 무관이 아닌 향리(鄕吏)·여진 추장(女眞酋長)·제주 왕족(濟州王族)·노령병사(老齡兵士)·악공(樂工)·공장(工匠) 등에게 주어져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문산계만 여러 번 개편되었을 뿐이었다.
995년의 문·무산계에는 정1품이 없고 5품 이상이 대부·장군(將軍), 6품 이하가 낭(郎)·부위(副尉)·교위(校尉)로 되어 있었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부터 문산계에 정1품이 생기고 4품 이상을 대부, 5품 이하를 낭이라 하였다.
한편, 중국식 문·무산계가 도입되자 고려의 토착관계(土着官階)는 향직(鄕職)으로 바뀌어 향리·여진 추장·군인·무산계 소지자(武散階所持者)들에게 주어지다가 현종 이후에 소멸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문산계가 문·무관의 관계로 이용되었다.
그 뒤 문산계와 무산계가 새로이 정비된 것은 1392년(태조 1)이었다. 이때의 문산계는 18품 30계, 무산계는 14품 20계이었다. 문산계는 정1품부터 종9품까지 18품계가 다 있었는데 비해 무산계는 정3품부터 종8품까지밖에 없었다.
즉 무산계에는 2품 이상계(二品以上階)와 9품계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문관에 비해 무관을 제도적으로 차별하는 문존무비사상(文尊武卑思想)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생각된다.
무산계의 9품계는 유외직(流外職)인 대정(隊正)·대부(隊副)를 대신했으나, 1436년(세종 18)에 정9품 진무부위(進武副尉), 종9품 진의부위(進義副尉)를 설치해 문산계와의 불균형을 일부 보완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2품 이상의 무산계는 설치되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문·무산계는 약간의 계명변경을 거쳐 『경국대전』에 법문화되었다. 조선시대 문·무산계는 참상계(叅上階)는 쌍계였고, 참하계(叅下階)는 단계였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문치주의가 강화되고 양반관료체제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왕족과 왕의 사위들까지도 문산계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443년(세종 25)에 종친계(宗親階)가, 1444년에 의빈계(儀賓階)가 문산계 내에 설치되었다. 이것을 문산계와 별도로 두었던 것은 국왕의 족친인 이들을 우대하면서도 이들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왕의 오복친(五服親)만이 받게 되어 있던 종친계는 6품 이상계만 있었고, 공주와 옹주에게 장가간 부마들이 받는 의빈계는 3품 이상계만 있었다. 그러나 왕의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는 종친계를 넘어서서 대군(大君)·군(君)의 작호를 받았다.
왕의 적녀인 공주와 서녀인 옹주도 마찬가지였다. 종친은 4대가 지나면 친진(親盡)되어 일반 문무관료와 마찬가지로 대우되었다.
1457년(세조 3) 세종조에 개척한 4군과 6진 지역의 영흥·경성·의주·회령·경원·종성·온성·부령·경흥 등 9개의 변경도시와 평양·강화·경주·전주·개성 등 5대 도시에 그 지방민들로 구성된 토관(土官)을 두고 이들에게 줄 토관계(土官階)를 신설하였다.
본래 조선시대에는 향리에게 관품을 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들 특수지역의 향리들에게는 특별히 토관계와 토관을 주어 회유하였다.
토관계는 신라의 외위(外位)와 고려의 향직계통의 관계로서, 중앙의 관계인 문·무산계와 같은 비중을 갖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토관계를 가진 사람이 문·무산계를 받을 때는 1품을 내려 받게 되어 있었다. 토관계는 5품 이하만 있었다.
1444년(세종 26) 천인들의 관계로서 잡직계(雜職階)가 신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천인들도 일정한 천직(賤職)에 임용될 수 있었다. 조례(皂隷)·소유(所由)·나장(螺匠)·장수(杖首) 등의 관직이 그것이다.
따라서 사천(私賤)이 이러한 관직에 임명되어 문산계를 받으면 자기의 상전보다 관품이 높아질 수도 있었다. 이것은 양반관료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천은 원래 9품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지만 국왕의 특지(特旨)를 받으면 상전보다 높은 관품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이들 사이의 주종관계를 무너뜨리는 강상(綱常)에 관한 문제였다. 잡직계를 문·무산계와 별도로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1444년의 잡직계에는 서반계(西班階)만 있었다. 『경국대전』에 동반잡직계(東班雜職階)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반계는 이 이후에 신설된 것 같다. 잡직은 천인 뿐 아니라 양인(良人)도 받는 수가 있었다.
마의(馬醫)·도류(道流)·화원·악사(樂師)·악생(樂生)·교서관수장제원(敎書館守藏諸員)·액정서사알(掖庭署司謁) 등이 그러하였다. 잡직을 가진 사람은 잡직계를 받게 되었는데, 양인의 경우 다시 문·무산계를 받을 때는 1계를 내려 받았다.
조선시대의 여자의 관품은 남편의 관품에 준하도록 되어 있었다. 관품을 가진 여자들을 명부(命婦)라 하였다. 명부에는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가 있었다. 내명부는 궁실 내부의 궁인들을 의미하며, 외명부는 문·무관의 부인(夫人)들을 의미한다.
명부제(命婦制)는 중국의 진(秦)·한(漢)에서 비롯해 수(隋)·당(唐)을 거쳐 금·원·명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이들 명부제가 미분화된 채로 섞여 쓰여 오다가 『경국대전』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
(4) 관직
관직에는 실직과 산직(散職)이 있었다. 실직은 직사(職事)가 있는 관직이요, 산직은 직사가 없는 관직이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그러한 구분이 없었고, 문반·무반과 같은 직능별 관직의 구분도 없었으며, 관직의 이름도 짐승 이름이나 토속어로 되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문반·무반·남반(南班), 실직·산직 등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관직의 이름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관직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많았고, 조선시대는 직능을 나타내는 고유의 관직명이 많이 쓰였다.
실직에는 녹봉을 받는 녹관(祿官)과 받지 못하는 무록관(無祿官)이 있었다. 녹관 중에도 정규직인 정직(正職)과, 6개월 또는 3개월마다 바뀔 수 있는 체아직(遞兒職)의 구분이 있었다. 실직에는 또한 경관직(京官職)과 외관직(外官職)의 구분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문관 동반직(東班職)은 1,779과(窠), 무관 서반직(西班職)은 3,826과로 동·서 양반직 총 5,605과였으며, 이 중 녹관이 5,510과, 무록관이 95과였다. 그리고 체아직 3,110 중 동반 체아직이 105과, 서반 체아직이 3,005과였다.
동반직 1,779과 중 경관직 741과, 외관직 1,038과였으며, 서반직 3,826과 중 경관직 3,324과, 외관직 502과였다. 이 가운데 다시 체아직을 뺀 동반 정직(東班正職) 1,579과 중 경관 정직(京官正職)은 541과이며, 서반 정직(西班正職) 821과 중 경관 정직 319과, 외관 정직 502과였다.
이를 보면 동반직보다 서반직이 배 이상이나 많았으며, 동반직은 외관직이 더 많은 데 비해 서반직은 경관직이 더 많았다. 이는 서반 경관직에는 군관체아직(軍官遞兒職)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군관 체아직은 군관에게 집중적으로 주어졌지만 국가에서 대우해야 할 사람들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위한 예비체아직(豫備遞兒職)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리고 동반 체아직은 대부분 기술직에 설치되어 있어서 양반들은 서반 체아직을 받을지언정 이를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 왕조의 양반들이 가장 갖기를 원하는 관직은 동반 경관녹관(東班京官祿官) 541과였다. 이 5백여 과의 문관직을 차지하기 위해 양반관료들은 붕당을 만들고 당쟁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무록관은 조선시대에 처음 생긴 관직이었다. 지방의 호족세력을 중앙으로 유치하려던 고려 왕조에서는 무록관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 중앙집권체제가 어느 정도 확립되자, 많은 사람들이 관직을 차지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관직의 권위가 높아지고, 녹봉을 주지 않아도 관직에 임명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청요직(淸要職)은 아니면서 양반이 맡지 않으면 안되는 관직에 무록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무록관이 비록 녹봉은 받지 못하지만 양반 실직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을 근무하면 다른 관직으로 옮겨갈 수도 있고 관료로서의 사회적 권위를 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관직으로 옮기거나 승진하는데 녹관보다 오래 걸리고 불리한 점이 있어 고과성적(考課成績)이 나쁜 관료들이 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조선 왕조는 무록관·체아직을 설치함으로써 녹봉을 절약하면서도 많은 관리희망자들의 사환욕(仕宦欲)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또한 국가경비를 절약하고 권력집중을 도모하기 위해 겸관제(兼官制)와 제조제(提調制)가 활용되었다. 겸관제와 제조제는 행정체계상 예겸(例兼: 官制에서 한 사람이 겸임하도록 되어 있는 직제)해야만 할 경우도 있었지만 권력집중과 경비절약에도 일조(一助)를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양반경관(兩班京官)의 겸관직(兼官職)은 132과에 달하였다. 이 중 75과는 문관직, 57과는 무관직이었다.
겸관직에는 녹봉이나 과전이 지급되지 않았고 따로 관원이 임명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사실상 동·서반 정직녹관의 수는 2,400과에서 동·서 경관겸관직 132과를 뺀 2,268과이다.
동반 경관 정직녹관의 수는 541과에서 동반 경관겸관직 75과를 뺀 466과이며, 서반 경관정직녹관의 수는 319과에서 서반 경관겸관직 57과를 뺀 262과에 불과한 셈이다.
그리고 동반 외관직은 겸관이 없었으나 서반 외관직은 502과 가운데 각도의 병마·수군절도사,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 병마우후(兵馬虞候) 등 21과를 제외한 481과가 모두 관찰사나 수령(守令)·경관직자(京官職者)에게 겸대(兼帶)되어 있었다.
결국 문관이 임명되는 경관 정직녹관 수는 466과, 외관 정직녹관 수는 1,008과였다. 그리고 무관의 경우에는 각각 262과와 340과였으며, 무록관 95과, 동반체아직 105과, 서반체아직 3,005과였다.
한편 제조제에는 43개 관서에 16원(員)의 도제조(都提調), 58원의 제조와 8원의 부제조가 있었다. 이들 관서는 대개 동반 경관직의 실무관서로서 정3품 이상이 각급 제조를 겸임해 사무를 지휘, 감독하게 되어 있었다.
제조직도 물론 행정체계상 예겸(例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당상관(堂上官) 중에서 적임자를 골라 겸임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업무의 중요성을 감안해 도제조, 혹은 제조·부제조를 10인 이내로 두었다. 그러나 제조도 겸관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상 녹봉 절약 및 권력집중과 관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제한된 관직 수에 비해 관직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자주 교체되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분권적(分權的)인 유력자의 출현을 억제해 철저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려는 목적과도 관계가 있었다.
예컨대 수령은 3년(조선 초기에는 6년), 감사(監司)는 1년의 임기가 주어졌으며, 본인 또는 일가친척의 고향과 같은 연고지에는 부임할 수 없었다.
동반 경관직은 원하는 사람이 많아 더욱 자주 교체되었다. 이들에 근무연한을 정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방면의 사무에 밝은 관원이 없어 사무의 연계가 어렵게 될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주요한 곳에는 자리바꿈을 하지 않는 구임관(久任官)을 두었다.
『경국대전』에는 이들 구임관의 수가 49과이다. 특히 봉상시(奉常寺)와 같이 오랜 경험이 요구되는 곳에는 더 많은 수의 구임관(6과)을 배정하였다.
산직에는 유급산직(有給散職)과 무급산직(無給散職)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훈직(勳職)의 성격을 띠는 동정직(同正職)·검교직(檢校職)과 단지 관직수를 늘리기 위해 설치되었던 첨설직(添設職)은 유급산직이었다.
조선시대의 영직(影職)·무록검교직(無祿檢校職)·노인직(老人職)·산관직(散官職) 등은 무급산직이었다. 이들의 차이는 전자에는 약간의 녹봉과 과전이 주어진 반면 후자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다.
고려시대에는 재지호족세력(在地豪族勢力)을 중앙정부의 통치하에 끌어들이기 위해 산직에도 경제적인 반대급부를 주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가 확립된 조선시대에는 구태여 이들에게까지 그러한 대우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관직의 권위가 높아져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이익 없이도 산직이나 차지해 사회적인 권위를 누리려 하였다.
관직은 본래 관품과 맞추어 제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관품과 관직의 본품(本品: 그 職事의 散位)이 반드시 일치할 수가 없었다. 관품은 관직세계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관직은 인물과 능력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의 불일치를 보완하기 위해 고려시대부터 행수법(行守法)이 실시되었다.
행수법은 관품이 직사보다 높은 경우에 행직(行職)을, 낮은 경우에 수직(守職)을 주는 제도이다. 그리고 직사가 관품보다 2품 이상 높은 것을 시(試), 관품과 직사가 동품(同品)인 것을 부(否)라 하였다.
수직의 경우 7품 이하는 2계(二階), 6품 이상은 3계를 뛰어넘어 받을 수 없었다. 행수법이 적용되면, 해당관청에서는 직사의 높고 낮은 것이 중시되었지만 그 밖의 의장(儀章)·과전·녹봉·음직·반차(班次) 등은 관품의 고하(高下)를 따랐다.
관품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근무일수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관직이 없으면 근무일수가 없기 때문에 승진이 될 수 없었다. 근무일수를 따지는 방법으로는 차년법(差年法)·도숙법(到宿法)·개월법(箇月法)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1년 단위로 근무성적을 평정하는 차년법이 유행되어오다가 공민왕 때에 직숙(直宿)일수로 성적을 평가하는 도숙법이, 공양왕 때에 근무월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가하는 개월법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으나 개월법이 가장 보편적인 근무평정방법이었다.
개월법은 일정한 근무월수를 채워야 승자(陞資)될 수 있었는데, 이를 사만(仕滿)이라 하였다. 근무일수[仕]는 하루를 기준으로 하나, 특별근무일수는 별사(別仕)라 하여 하루 이틀 이상을 쳐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사법을 순자법(循資法)이라 하였다. 순자법은 당나라에서부터 발달해온 합리적인 인사방법이었다.
양반의 경우 1자(資)를 올려 받는데, 참하관(叅下官)은 15개월, 참상관(叅上官)은 30개월의 근무월수가 필요하였다. 당상관은 순자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기술관은 참하관에 514일, 서리(書吏)는 2,600일이었다.
그러므로 과거에 합격하거나 왕의 특지(特旨)를 받기 전에는 참상관 이상으로 올라가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였다. 과거는 그 기간을 단축시켜주는 구실을 했으며, 청요직을 받은 사람은 근무일수와 상관없이 승진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무월수가 찬다고 해서 반드시 승진되는 것은 아니었다. 승진을 위해서는 또다시 고과성적(考課成績)과 포폄성적(褒貶成績)이 문제되었다. 고과성적은 경관인 경우 이조·병조가, 외관인 경우 관찰사가 작성해 국왕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6월 15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경관·외관의 포폄이 실시되었다.
포폄도 경관은 해당 관청의 당상관·제조와 해당조(該當曹)의 장관이, 외관은 관찰사가 하였다. 포폄성적은 매년 6월과 12월에 이조·병조가 실시하는 도목정(都目政)이라는 인사발령에 반영되었다.
이 때 성적이 모두 상(上)이면 승진되지만 중(中)이 있으면 승진되지 못하거나 파직되었다. 포폄성적은 전최(殿最)라고도 하였다. 전(殿)은 성적이 나쁜 것을 말하고, 최(最)는 성적이 좋은 것을 말한다.
도목정은 일 년에 두 번 하는 것이 보통이나 체아직과 같은 경우는 일년에 두 번 또는 네 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정규인사발령을 도목정이라 했으며, 수시로 하는 인사발령은 전동정(轉動政)이라 하였다. 도목정이 실시되기 전에 왕이나 고급관료, 또는 충훈부(忠勳府)에서 관원후보자를 추천하였다.
『경국대전』 천거조(薦擧條)에 의하면, 매년 봄에 문관 3품 이상, 무관 2품 이상은 수령·만호(萬戶)가 될 만한 사람을, 의정부·육조 당상관 및 사헌부·사간원 관원들은 관찰사·절도사가 될 만한 사람을, 충훈부는 공신 자손 중 이임(吏任)을 감당할만한 사람을 각각 추천하게 되어 있었다.
추천인원은 3인이었으며, 추천된 사람에게 잘못이 있으면 추천한 사람도 연좌되었다. 음직을 받을 사람은 매년 정월에 간단한 시험을 거쳐 7품 이하의 관직을 주되, 녹사(錄事)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들어주었다.
이렇게 하여 관직을 제수 받은 자는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을 거쳐야만 하였다. 서경은 일종의 신원조회로 세계(世系)가 불분명하거나 범죄사실이 있으면 관직에 임명될 수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모든 관원이 서경을 받았지만 조선시대에는 5품 이하만 대간의 서경을 받았고, 4품 이상은 왕의 교지로만 임명되었다. 이렇게 교지를 받거나 서경을 거친 자는 고신(告身)이라는 관원증명서를 발급받았고, 왕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한 다음 관직에 나아갔다.
이들은 3년마다 한 번씩 작성하는 정안(政案)에 기록되었으며, 당상관은 좌목(座目), 당하관은 반부(班簿)라는 명부에 각각 기록되었다.
한편 종친이나 2품 이상의 문·무관은 3대를 추증하였다. 부모와 처는 자기와 같은 관품에,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자기의 관품에서 한 등급을 내려 추증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친이나 친공신(親功臣)·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낸 문·무관에게는 죽은 뒤에도 봉상시에서 시호를 내려주고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수 있게 하였다.
관리가 되는 길은 타천(他薦)인 천거(薦擧)와 자천(自薦)인 시험이 있었다. 천거에는 음서·은일(隱逸)이 있었고, 시험에는 과거·취재(取才)가 있었다(시험과목은 유교경전이나 전공서적이었다). 음서는 고관자제에게 주는 세관(世官)의 특혜로서 혈통을, 과거와 실기시험인 취재(군사의 경우는 試取라 하였음)는 능력을 중시하였다.
이 혈통과 능력은 우리 전근대사회의 관리등용의 두 가지 큰 요소였다. 고대로 갈수록 혈통이 강조되었고, 후대로 올수록 능력이 더 강조되었다. 그러나 별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혈통에 의해 관직을 받은 자가 시험을 통해 누구보다도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조선 사회가 신분사회이면서 관료사회의 속성을, 관료사회이면서 신분사회의 속성을 띠었던 것이다.
관리가 되려면 품관들의 세계인 유품(流品)에 들어가야만 하였다. 유품에 들어가는 것을 입류(入流)라 하고, 이를 유내(流內)라 하여 유품에 들지 못한 유외(流外)와 구별하였다. 유외에는 내시·잡직 등 천직이 소속되어 있었다.
유내의 사람이라도 신분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품계가 한정되어 있는 한품(限品)이 있었다. 한품에 이르면 거관(去官)해 다른 직종으로 옮겨가거나 그 직을 그만두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직종으로 옮겨가는 것은 일정한 수로 한정되어 있었다. 한품에 걸리지 않는 신분이라도 참상관인 6품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이를 출륙(出六)·승륙(陞六)이라 하여, 양반이나 잡과 합격자가 아니면 행정실무자층으로서 뚫고 올라가기가 어려웠다.
양반관료라도 승문원(承文院)·홍문관의 관원 및 지방의 교관(敎官), 체아직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수령을 거치지 않으면 4품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왕의 특별명령을 받은 사람이나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 이외에는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봉상시정(奉常寺正), 통례원좌·우통례(通例院左右通禮), 훈련원정(訓鍊院正)을 거치지 않고서는 당상관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청요직(이조와 병조의 郎官·臺諫·翰林·宣傳官 등)을 지낸 사람은 그 아들의 음직을 보장해주고 승진도 빨라 쉽게 고관이 될 수 있었다.
참하관이 행정직, 참상관이 목민직(牧民職)이었고, 당상관은 정책을 수립하는 고관직이었다. 당상관들에게는 많은 특전이 있었으며, 70세가 되어 치사한 뒤에도 궤장(几杖)을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국정에 자문하였다. 그리고 공신과 그의 적장자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일정한 녹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