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방형(邦衡)이다.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지직(李之直)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다. 무술에도 뛰어나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이 되었다. 1459년 성균관주부를 거치고, 이어 회령도사·지평, 도체찰사의 종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김구(金龜)·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교정손자주해(校正孫子註解)』를 찬하였다.
1467년 부호군으로 만포절제사(滿浦節制使)가 되었다. 건주위 정벌의 군공으로 3등공신이 되어 노비 6구(口)가 하사되었다. 1469년(예종 1)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2년(성종 3)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147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영안도관찰사, 1479년 강원도관찰사, 1481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절도사·한성부판윤·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84년 대사헌을 거쳐 1486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의금부당상·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98년에는 좌찬성을 역임했다. 이듬 해에는 경변사(警邊使)로 나아갔다. 1500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그 이듬 해 좌의정 성준(成俊)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와 『서북지도(西北地圖)』를 편찬하였다.
1502년에는 영의정 및 좌의정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왕에게 상소하였다. 1503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여러 차례 연산군의 황음(荒淫)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 해 갑자사화 때 조카 이세좌(李世佐)와 함께 연루되어 인동(仁同)으로 귀양가서 사사되었고, 뒤에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