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1995. 경기도 화성 출신. 1983년 6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기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살풀이 · 태평무 · 승무 · 진쇠춤 · 검무 · 희극무 · 선달무 · 북춤 · 소고춤 등 17가지의 춤에 능했고, 어름산이(줄타기) · 대금과 태평소 · 남도잡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예의 소유자였다.
그는 할아버지 이하실(李夏實)과 아버지 이재학(李在學)이 모두 재인청의 도대방을 지낸 경기도 세습무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화성 재인청은 오늘날 예술인총연합(예총)과 같은 기능의 예술인 총괄기관으로 악(樂) · 가(歌) · 무(舞) · 음(音) · 곡(曲) 등 국악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 자신도 14세 때에 3대째 도대방을 지낸 인물이다. 재인청은 3년 뒤 민족혼을 심는다하여 일제가 해산시키니, 그는 바로 조선왕조의 마지막 재인청(혹은 神廳이라고 함) 도대방(都大房)이었다.
13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14세 때에 남사당패에 홀려 무단 가출을 했고, 1920년 박승필에게 발탁되어 광무대 및 원각사, 문낙정에 출연하게 되면서 10여 년간 본격적으로 예인의 수업을 받게 되었다.
재인청 출신이며 당대의 춤 명인이었던 김인호(金仁鎬) 선생에게 30여 종의 전통 무용과 장단을 배웠다. 광무대 시절 김관보(金官寶)에게 줄타기를, 장점보(張點寶)에게 대금과 피리, 해금을 배웠으며, 방태진(方泰鎭)에게 태평소를, 조진영(趙鎭英)에게 남도잡가를, 박춘재(朴春在)에게 발탈을 배웠다.
당시 그의 인기는 세상을 뒤흔들었다고 한다. 그가 줄을 타면 소 두 마리 값을 받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고, 열광한 구경꾼 등의 팁은 하룻밤에도 한 달 봉급을 넘었다. 24세 때는 수원 권번 선생을 하였다.
그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발탈은 가로 1m, 세로 2m의 비좁은 포장 속에 숨어 온갖 재담과 소리로 엮는 가면극의 한 종류이다. 어릿광대의 재담을 통해 양반 사회나 세상 인정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1927년 일본 전지역 순회공연을 했으며, 1929년에는 대동가극단에서 임방울, 이화중선 등과 같은 당대의 명인들과 중국 만주를 거쳐 러시아 국경지대까지 순회공연을 했다. 1933년 조선 성악회 회원이 되었으며, 조몽실, 오수암, 이동백, 김창환, 정정렬, 조진영, 임방울, 한성준 등의 명인들과 함께 다니며 전통 무용과 줄타기 공연을 했다.
1936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당대의 명고수 한성준의 초청으로 전통무용 강사 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 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지도했다. 1945년 여성국보단체를 조직하여 대표를 지냈고, 1948년 대한국악, 음악, 무용 전문학원을 설립했다.
1957년 부산 KBS-TV에서 태평무와 발탈을 발표하였으며, 부산 여성농악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1958년 유라룡, 박헌봉, 박석희 등과 함께 대한 국악원을 창립하여, 경기도 지부장을 지냈다. 1963년 대성여고, 선화예고 무용강사를 지냈으며, 1965년「동래야류」로 부산민속예술협회 지도 강사가 되었다.
1973년서울로 올라와 신당동에 무용학원을 개원하였다. 1975년 국악협회 온양지부장을 지냈으며, 1977년 3월 4일 한량춤 및 발탈 발표회(전통무용연구회 주최)를 개최하였다. 1979년 공간사랑에서 발탈 장기공연을 하였으며, 1982년 한국 국악협회 서부 지부 지부장을 지냈다. 한국국악협회의 공로상을 수상했다. 1983년 한국명무전(세종문화회관)과 한국 명무 큰잔치(서울 국립중앙극장)에 출연했다. 1985년에는 무용인생 80년을 기념하는 공연 ‘이동안 춤판-팔순 기념공연(문예회관 대극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20여 회에 걸쳐 ‘발탈 및 전통무용 발표회’를 개최하였다. 김백봉(金白峰), 문일지(文一枝), 배정애(裵貞愛) 등 무용계의 거목들이 대부분 그의 제자이다. 신숙(愼淑)과 장월중선(張月中仙)에게는 잡가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