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교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 개항기
개항기 때, 내무부참의,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치억(稚億)
인물/근현대 인물
  • 본관연안(延安)
  • 사망 연도미상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851년(철종 2)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장영민 (상지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개항기 때, 내무부참의,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치억(稚億). 아버지는 현령 이원흥(李源興)이며, 어머니는 안익중(安翊重)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2년(고종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록(官錄)·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1879년에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인 윤자승(尹滋承)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885년에 전라좌도암행어사가 되었지만, 능주목사(綾州牧使) 김익성(金益成)의 국상이 실제와 많이 틀린다고 하여 중추(重推)를 당하였다. 그러나 2년 뒤에 다시 전라좌도암행어사로 나가 흥양(興陽)의 진결(陳結) 폐단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그 뒤 내무부참의·대사간·이조참의를 순탄하게 천임하였지만, 신식제도에 어둡거나 불필요하다고 판단된 관리들이 대량 퇴직당한 갑오경장 이후에는 한동안 등용되지 못하였다.

수구파가 득세하였던 1898년 중추원의관이 된 뒤 서리대신사무·비서승 겸 장례를 역임하였고, 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899년 정종대왕을 추상존호(追上尊號)할 때 채제공(蔡濟恭)과 이이장(李彝章)을 종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9년 비서원 승,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 - 『고종실록(高宗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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