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 출신. 경성의전을 2기로 졸업하고 송도중학교 교원으로 지내다가 1938년 일본경찰에 잡혀 교단을 떠나게 되자 『조선교육사』 저술에 몰두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뤘고, 1943년부터 여운형(呂運亨)의 건국동맹에 참가하였으며, 1946년 6월 그동안 다년간 역임하던 배화여학교 교장직을 그만두자 책의 출판을 제의받고 마침내 한국인 손으로 쓰여진 최초의 『조선교육사』를 출간하였다. 이밖에 『여운형선생투쟁사』가 있다.
1947년 5월 이후에는 근로인민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1948년 4월 남북협상 이후 북한에 잔류,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다.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56년 5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확대회의 호소문안을 작성하였다.
1957년 2월 조국문자개혁연구위원장을 맡았으며, 8월에는 다시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이 되었다.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 겸 상무위원을 지냈다. 이듬해 10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965년 2월 조국통일사 사장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