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은경(殷卿). 종실 백피도정(白陂都正) 이상(李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옥계도정(玉溪都正) 이현동(李賢童)이다. 아버지는 이맹원(李孟元)이며, 어머니는 윤종손(尹宗孫)의 딸이다.
151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형조좌랑·지평·장령·헌납·교리·사간·예조참의·병조참의·병조참지·형조참판·경주부윤·대사간·호조참판 등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534년(중종 29) 헌납으로 있으면서, 무과초시(武科初試)에서 강서(講書)할 때 시관이 빨리 합격자를 발표하고자 과거보는 사람 중에 점수가 적은 사람에게는 들어와 강서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는데, 과거를 이처럼 거칠게 할 수 없다며 그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1537년에 장령으로 사헌부의 여러 관원과 더불어 외척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과 김안로(金安老)를 죄줄 것을 청하였다. 시독관이 되어 당시 첨사(僉使)·만호(萬戶) 등이 백성들에게 침탈한 재물을 조정의 김안로에게 뇌물로 바친다 하고 염치를 숭상하는 풍습을 받들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1538년에는 언관으로서 현량과(賢良科)의 복구를 주장하다가 외방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어 위엄을 부리지 않고 일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며, 백성들의 부세와 요역을 간략히 하여 몇 달 사이에 교화가 널리 베풀어져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1559년(명종 14)에 대사간이 되어 열 조목의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상소했는데, 기강을 세우고 학교를 높이고 하늘의 경계에 조심할 것, 언로를 열 것, 사기 양성, 내시 억제, 상벌을 분명히 할 것, 수령 선택, 어진이를 등용할 것, 염치를 북돋울 것 등이었다. 사람됨이 간소하여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직무를 이행함에 청렴·근면하여 훌륭하다는 평판과 함께 청백리에 뽑히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