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화(聖和). 이재악(李載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세규(李世規)이다. 아버지는 이의집(李宜輯)이며, 어머니는 박태한(朴泰翰)의 딸이다.
1756년(영조 3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문학·지평·장령·사간·집의·부수찬·찬독 등을 역임하였다. 1760년에 대간(臺諫)으로서 패초(牌招: 임금이 패를 내려 신하를 부르던 제도)의 명을 어기고 분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동료 신응현(申應顯)·신사운(申思運) 등과 함께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773년(영조 49)에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2차 인사기록)에 올랐고, 영조의 국장에 도청으로 참여하여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777년(정조 1)에 영월부사로 있으면서 홍낙순(洪樂純)·홍계능(洪啓能)·민홍섭(閔弘燮)의 역모에 연루되어, 추자도(楸子島)에 정배되었다가 다시 서용되어 승지가 되었다.
1793년(정조 17)에 영종진병마첨절제사(永宗鎭兵馬僉節制使)에 제수되었으나 이 때 함께 벼슬에 제수된 이의직(李義直) 등과 함께 의리를 내세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나이 70이 되던 1797년에 정조의 특명으로 이보온의 인품과 학식이 뛰어나다 하여 도총부도총관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