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2종의 필사본이 있다. 그 중 하나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전의 일기까지 합쳐 모두 10여 책의 자필본으로 구성된 것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소실되자, 재주가 비범한 이원익의 서녀(庶女)가 암송하고 있던 임진왜란 이후의 부분을 자손들이 4책으로 기록한 것이다. 권두에 「가록(家錄)」이 있다.
다른 하나는 1930년에 일인들이 앞서 말한 책의 시기적인 편차의 오류를 바로잡아 다시 쓴 것으로 보인다. 권말에 성명 미상의 인물이 이 책이 전해지게 된 내력을 서술한 발문이 있다. 1969년 탐구당(探求堂)에서 영인·간행한 『패림(稗林)』 제6집에 수록되어 있다.
4권 4책. 필사본. 규장각 도서에 있다.
권1은 1592년부터 1602년까지, 권2는 1603년부터 1610년(광해군 2)까지, 권3은 1611년부터 1615년까지, 권4는 1616년부터 1623년(인조 1)까지 모두 32년간의 기록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선조의 피란을 준비하기 위해 평안도도순찰사 겸 이조판서에 임명되면서부터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영의정에 제수될 때까지 겪은 일들이 편년체(編年體)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간 중 이원익은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및 1613년에 일어난 계축옥사 등 정치적 격변기에 조정의 핵심적인 지위에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에는 임금의 피란을 선도하면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병사 이윤덕(李潤德) 등과 함께 민병 수천 명을 이끌고 평양성의 수비를 담당하던 중 별장 고언백(高彦伯)·문신언(文愼言) 등과 함께 용사 수백 명을 선발하여 적진을 야습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전투 상황과, 이로 인해 발생한 쌍방의 피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등은 전란사(戰亂史) 연구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이듬 해 원군(援軍)으로 온 명군(明軍)의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전개한 평양성 탈환작전을 비롯해 명군과의 불화에 관한 기록 등도 귀중한 자료이다. 그밖에 1608년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건의하여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개선하게 된 배경이 적혀 있다.
1615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론에 반대하다가 강원도 홍천에 유배되어 겪은 고초를 비롯해, 1620년 전국을 휩쓴 흉년으로 각처에서 일어난 기근과 이에 대해 조정에서 시행한 구제책의 모순점 등에 관한 기록들도 자료적 가치가 있다. 정치적 변란을 둘러싼 당시 핵심인물들의 상소·계문(啓文) 등도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요약하여 수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