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고범(孤帆)이고 필명으로 고성(孤星), 관악산인(冠岳山人), 춘풍(春風) 등을 썼으며, 창씨개명한 이름은 목산서구(마키야마 쯔이구)다.
1899년 4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제일고등보통학교와 사립 오성학교를 중퇴하였다. 1920년 매일신보사 신춘문예 공모에서 「고독에 우는 모녀」로 등단하였고, 4월 『동아일보』 창간기자로 입사하여 1921년 8월까지 활동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였으나 1922년 중퇴하였다. 1922년 5월부터 연극운동단체인 토월회 창립 동인으로 참여해 1926년 2월까지 활동하였다. 1924년 9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동경(도쿄)특파원을 지내다가 1926년 5월 매일신보사 사사(司事)를 거쳐 10월 사회부장으로 승진해서 1929년 5월까지 재직하였다. 1927년 11월 최상덕, 최남선 등과 함께 문예잡지 『소년조선』을 창간하였고, 12월 이익상(李益相), 김기진(金基鎭), 안석주(安碩柱) 등과 함께 영화연구회 찬영회(讚映會) 조직하였다. 1929년 동양영화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전무를 역임하면서 이구영 감독의 「승방비곡」을 제작하는 등 대중예술계에서 활약하였다.
1931년 4월 희곡 「동백꽃」(『신민』, 1931.4)을 기고하였고 극단 연극시장·신무대·협동신무대 등을 거치며 다수의 극본을 창작하였다. 1932년 12월 송선익, 홍찬 등과 함께 대중잡지 『금강』을 창간하였다. 1935년 11월 연극전용 극장인 동양극장이 개관하자 그곳 전무 겸 전속작가로 1939년까지 근무하면서 다수의 대중극을 창작하였다. 대표적으로 1937년 11월 동양극장 전속극단 호화선이 상연하여 큰 호응을 받은 「어머니의 힘」을 집필하였다. 1937년 전후해서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부터 경성방송국 제2방송부에서 일하면서 방송극 대본을 제작하였고, 「홍도야 우지마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낙화춘풍」 등 대중가요 작사도 하였다.
1940년 12월 조선극작가 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연예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2월 2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통제하에 조직된 조선연극협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하였다.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겸하였고, 2월 문화인성초부대(文化人聖鍬部隊) 일원으로 부여신궁에 근로봉사를 하였고, ‘문화익찬의 반도체제’ 좌담회에 참석하여 이동연극을 통한 선전활동 강화를 역설하였다. 3월 부여신궁 근로봉사 소감문으로 「사람값을 한 기쁨」(『신시대』, 1941.3)이라는 글을 기고하였고, 4월 좌담회 ‘8단체 간부가 말하는 새로운 문화단체의 움직임’ 에 참석하였다. 5월 ‘내선일체’를 내용으로 하는 무용극 「부여회상곡」 대본을 집필하였다. 9월 조선연극협회 직속 이동극단 공연대본인 「익모초」를 집필하고, 이동연극 중앙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예술부문 연락부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월 필승체제하 연극인의 결의좌담회인 ‘국민극의 제2년’에 참가하여 연극인들의 적극적인 전쟁협력을 주문하였다. 1943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 상담역에 선임되었고, 7월 조선군보도부 보도연습에 참가한 후 소감문인 「보도연습기」를 『조광』에 기고하였다. 1944년 7월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간사장을 맡았고, 12월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이동연극예능대회에서 일어극 「봄의 역사」를 집필하였으며, 1945년 8월 3일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회장에 취임하였다.
다수의 영화평론과 연극평론을 기고하여 전시체제 하에서 일제가 실시한 문화통제정책을 옹호하고 선전하였으며, 영화 연극인의 전쟁협력과 전쟁참여를 역설하였고, 황국신민의 의무를 피력하였다. 대표적인 글로 「신체제와 조선연극협회 결성」(『삼천리』, 1941.3), 「금후의 국민극」(『매일신보』, 1941.10. 21~25), 「배미(排米),영(英)을 강조한 동아적 작품상연」(『매일신보』, 1941.12.26), 「국어극의 현상」(『국민문학』, 1944.5) 등이 있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서울시청 공보실장으로 임명되었고 1949년 한국무대예술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종군작가단의 부단장으로 활동하여 이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장희빈」, 「강화도령」, 「민며느리」 등 궁중사극을 소재로 하는 방송극을 주로 집필하였다. 1966년 방송인협회 이사장, 1974년 방송작가협회 이사장 등 방송계, 연극계, 영화계에서 두루 활동하였다. 1981년 5월 25일 사망하였다.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1977년 문화훈장 보관(寶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