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복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호조참의, 전주부윤, 의주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백선(伯善)
북촌(北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5년(선조 8)
사망 연도
1621년(광해군 13)
본관
전의(全義,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
주요 관직
호조참의|전주부윤|의주부윤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중기에, 호조참의, 전주부윤, 의주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백선(伯善), 호는 북촌(北村). 이윤남(李胤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언우(李彦佑)이다. 아버지는 이경천(李慶千)이며, 어머니는 이세증(李世曾)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대교·저작·수찬, 병조좌랑, 정언·지평·헌납·응교·사간, 장악원첨정, 사인, 사복시정, 보덕·동부승지·우부승지·참찬관·부제학·우승지, 호조참의·전주부윤·의주부윤·병조참판·개성유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명종실록』 편찬시 편수관으로 참여하였으며, 1600년(선조 33) 사관(史官)으로서 상번(上番)인 목장흠(睦長欽)과 더불어 하번(下番)으로 좌·우사(左·右史)가 되었는데, 자리를 자주 비웠던 일로 탄핵 추고를 당하였다.

1602년 정언으로 당시 권세에 있던 정원군(定遠君)의 가노(家奴)들이 악행을 부리다 이를 사리에 맞게끔 논핵하여야 된다는 주장이 동료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자 사직을 주청하였다.

1607년에 유성룡(柳成龍)이 죽자 예전부터 승지를 보내어 치조(致弔)하는 예가 있다고 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 폐모 문제가 의정부에서 일어나자, 이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느끼듯, ‘변고에 대처하는 문제를 타당성 있게 처리하는 것 뿐’이라고 하였다.

1618년에 의주부윤이 되었는데 누루하치[奴兒合赤]가 사하보(沙河保) 등을 침범하자, 이에 밀운(密雲)의 왕군문(汪軍門)이 병마(兵馬)를 조발(調發)하여 토벌하려 한다고 급히 보고하였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