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백선(伯善), 호는 북촌(北村). 이윤남(李胤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언우(李彦佑)이다. 아버지는 이경천(李慶千)이며, 어머니는 이세증(李世曾)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대교·저작·수찬, 병조좌랑, 정언·지평·헌납·응교·사간, 장악원첨정, 사인, 사복시정, 보덕·동부승지·우부승지·참찬관·부제학·우승지, 호조참의·전주부윤·의주부윤·병조참판·개성유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명종실록』 편찬시 편수관으로 참여하였으며, 1600년(선조 33) 사관(史官)으로서 상번(上番)인 목장흠(睦長欽)과 더불어 하번(下番)으로 좌·우사(左·右史)가 되었는데, 자리를 자주 비웠던 일로 탄핵 추고를 당하였다.
1602년 정언으로 당시 권세에 있던 정원군(定遠君)의 가노(家奴)들이 악행을 부리다 이를 사리에 맞게끔 논핵하여야 된다는 주장이 동료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자 사직을 주청하였다.
1607년에 유성룡(柳成龍)이 죽자 예전부터 승지를 보내어 치조(致弔)하는 예가 있다고 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 폐모 문제가 의정부에서 일어나자, 이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느끼듯, ‘변고에 대처하는 문제를 타당성 있게 처리하는 것 뿐’이라고 하였다.
1618년에 의주부윤이 되었는데 누루하치[奴兒合赤]가 사하보(沙河保) 등을 침범하자, 이에 밀운(密雲)의 왕군문(汪軍門)이 병마(兵馬)를 조발(調發)하여 토벌하려 한다고 급히 보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