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기.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희룡(李希龍)과 그의 아들 문진(文軫) 및 며느리 김씨에 대한 충(忠) · 효(孝) · 열(烈) 삼강(三綱)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이희룡은 자가 응서(應瑞)이고 본관은 옥구(沃溝)인데,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여 1581년(선조 14) 만호(萬戶)가 되고 1591년(선조 24)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의 적정을 살피고 오라는 명을 받고 경주와 울산 지방의 상황을 탐지하고 돌아가던 중 충주에서 적을 만나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문진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그 곳으로 달려가다가 영천에서 적을 만나 역시 순절하였다. 문진의 처 김씨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고 3개월 동안 전장을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공을 높이 받들어 1710년(숙종 36) 이희룡에게 호조참의(戶曹參議), 문진에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의 관직을 추증하고 정각(旌閣)을 하사하였으며, 1766년(영조 42) 지금의 위치에 그들의 행적을 기리어 비석을 세웠다.
이 삼강묘비는 형조판서 겸 홍문관 · 예문관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이 비문을 짓고, 경주부윤 경주진병마절제사(慶州鎭兵馬節制使) 홍재(洪梓)가 글씨를 썼다. 비석의 전면은 15행, 후면은 16행으로 되어 있으며 각행의 글자수는 36자이다. 그리고 비액(碑額)은 전서(篆書)로 썼고 본문은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