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중선(仲先). 종실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천군(龜川君) 이수(李睟)이다. 아버지는 봉산군(蓬山君) 이형신(李炯信)이며, 어머니는 한득일(韓得一)의 딸이다.
1691년(숙종 17)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1694년(숙종 20)에 승지가 되었다. 이 때 형조에서 호남의 간민(奸民)과 병조서리가 함께 모의하여, 섬에 거주하는 한정(閑丁: 놀고 있는 성인 남정)을 조사하여 찾아낸다고 거짓 공문을 내어 폐를 일으킨 죄로 효수하게 되었는데, 형조가 그 죄를 논하여 왕에게 아뢰 치죄를 묻지도 않은 채 바로 처단하는 것은 인명을 중시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직언하였다.
1697년(숙종 23)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서는 고성(高城)의 굶주린 형제가 서로 먹으려 하다가 함께 굶어 죽은 사건으로 추고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승지·동지부사(冬至府使)·형조참판을 거쳐, 다시 승지·동래부사가 되었다.
이 때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변방 수령이 싫어 관직 교체를 꾀하는 습속이 가악스럽다 하여 특명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1706년(숙종 32)에 대사간·경상감사를 거쳐 1713년(숙종 39)에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 때 숙종 재위 40주년을 맞아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존호(尊號)의 예를 마련하고자 하자, 왕에게 이를 받아 들이지 말도록 상언(上言)하였다. 1716년(숙종 42)에 도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사직이 되었다.
이 때 연명 상소로 세자의 위호(位號) 제정을 독촉하여,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