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오운(五雲). 경상북도 영일 출신. 이언적(李彦迪)의 15대손으로 아버지 이석정(李錫政)과 어머니 이사봉(李泗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까지 향리에서 한학과 4년제 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하고 흥해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 졸업하였다. 1930년영일군 산림기수보로 취직하였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각고 끝에 자수성가하여 1935년 아사히공예주식회사[朝工藝主式會社]를 설립했으며 1937년에는 아사히피복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일본대학을 중퇴하고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대구에서 경북기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사장에 취임했고, 1949년 재일한국인경제동우회를 창립하여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51년 삼경물산주식회사 사장, 1956년 재일한국인무역협회 회장, 1957년 한국나이론주식회사 회장을 지냈으며, 1960년에는 경상북도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 국제연합협회 세계연맹본부회의 대표로 제18차 뉴욕총회에 참석하였으며, 한국수출산업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 대구 동구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하여 상공위원으로 활약했다.
1966년 국제연합 한국협회 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동대구역건설 추진위원장, 대한속기사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한국수출공단 준공식에서 대통령 유공표창을 받았으며,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농림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8년 삼경개발주식회사 사장, 1976년 코오롱그룹 회장, 1977년 코오롱그룹 명예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4년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의장에게 농공병진공업입국·수출입국을 건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구로공단·구미공단의 조성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한국의 합섬섬유시대를 개척했으며, 미곡다수확품종인 통일벼 개발의 선구역할을 하였으며, 산림녹화를 위해 전신주와 레일침목을 콘크리트화, 프로판가스 연로사용으로 연료의 대체, 택지절약을 위한 아파트건설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나의 정경오십년(政經五十年)』(1994)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