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재각(載覺), 자는 윤명(允明)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현손(玄孫)으로, 장헌세자의 3남인 은전군 이찬의 손자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의 아들이다.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왕실 업무와 외교사절로 활동하였다.
1874년 한성(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91년 증광시 진사에 급제, 189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문에 들어섰다. 1895년 비서감(秘書監) 비서랑(秘書郎)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경연원시독(經筵院侍讀)과 왕태궁시독관(王太宮侍讀官)이 되었다. 1897년 중추원 의관(議官)이 되었고, 1898년에 시강원시독관과 비서승(秘書丞)을 지냈다.
1899년 규장각 직학사(直學士)를 비롯하여 황태자궁 시강원부첨사(侍講院副詹事)·홍문관 부학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후 정3품 당상관 관직인 도정(都正)에 봉해졌다가 의양군(義陽君)으로 진봉(進封)된 뒤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
1902년 1월 특명영국대사로 임명되어 그해 4월부터 8월까지 영국에 체류하며 영국 에드워드 7세 즉위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1903년 전선사제조(典膳司提調)가 되었고, 이듬해 군부(軍部) 포공국장(砲工局長)으로 임명되어 신식군대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5년 종정원경(宗正院卿)에 이르렀고, 같은 해 3월 러일전쟁 전승 축하 특파대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1개월간 머물렀으며, 7월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다.
1907년 1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고, 4월 육군 참장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대동문우회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1908년 6월 유길준이 설립한 계산학교장(桂山學校長)을 역임하였고, 9월 상공 권무사 총재로 활동하였다. 1909년 1월 순종의 서도 순행시 호종(扈從)하였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강권으로 이루어진 행사로, 부산과 마산에 정박한 일본 군함 시찰을 시작으로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행하는 일정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1904년에 훈1등 태극장(太極章)을 받았고, 1905년 3월 외교사절과 직무에 대한 공로로 대훈(大勳)에 승서되고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다. 또한 1907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활동한 공로와 황실 종친 업무에 대한 공로로 서성대훈장(瑞星大勳章)을 받았고, 최고의 훈격인 대훈금척장(大勳金尺章)을 받았다.
일제 강점 이후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 한일병합에 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16만 8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1912년 8월 1일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같은 해 일본 정부로부터 종4위에 서위되었고, 1924년 종3위에 서위되었다.
1915년에는 일제가 시정을 선전하기 위해 개최한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에서 유공회원으로 활동하고 1백원을 협찬하였다. 같은 해 11월 다이쇼[大正] 일왕 즉위 대례에 귀족 총대로 참가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다이쇼대례기념장[大正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19년 고종황제 국장시 수릉향원(守陵享員)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향년 62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