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舜敬) 또는 순교(舜敎)이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고 군수 이유헌(李裕憲)과 풍양 조씨(豊壤趙氏)의 아들이다.
1837년 3월 13일 한성부에서 태어나 1874년 5월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이후 1876년 1월 호조 참의(參議), 1879년 5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1881년 8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1882년 5월 이조 참의가 되었다. 이후에도 1883년 9월, 1884년 4월, 1892년 4월에 여러 차례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1892년 8월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893년 7월 동지 부사(冬至副使)에 임명되어 11월 사행(使行) 하직(下直) 인사를 하고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4월 복명(復命)하였다. 그후 6월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직후인 1897년 11월 시강원 첨사(詹事), 12월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가 다시 1900년 2월 시강원 첨사와 궁내부 특진관에 번갈아 임명되었고, 3월 태의원경(太醫院卿), 4월 궁내부 특진관, 8월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이후에도 1907년 4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과 장례원경에 임용되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 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7일 발표된 남작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그에 따라 1911년 1월 13일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은사공채권 교부식에 참석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같은 해 2월 22일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참석하였다. 1911년 8월 29일자 『매일신보』에 ‘한일합병’ 1주년을 맞아 일제의 조선지배와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축사를 게재하였는데, 주요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일시동인(一視同仁) 하심은 중천의 해와 같고/ 성명(聖明)하신 교풍(敎風)은 사방에 미치었네/ 광대하게 천하를 비추니 바다 모통이까지 햇빛이 이르도다./ 거동하시어 다스림에 애초부터 원근과 내외의 구별이 없으시니/ 나아가시는 곳마다 모두 천황폐하의 품안으로 귀부(歸附)하였도다./ (……) / 아! 아름답도다! 모두들 만세 만세 만만세의 송덕을 가슴에 새기네 / 아! 성대하도다! 누군들 우러러 이같이, 이같이, 다시 이같이 축원하지 않으리요.”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종4위에 서위(敍位)되었으며,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를기념하는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12월 18일 사망하여 작위는 1918년 2월 12일 장남 이규환이 세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