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배언(拜言)이다. 이경용(李慶鎔)의 아들로 태어나 이하전(李夏銓)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65년 10월 1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1879년 종친부 참봉에 임명되었고, 1884년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가 되었다가 1889년 12월 알성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1890년 사간원 헌납을 비롯하여 총어영 군사마(總御營軍司馬)·사헌부 장령·홍문관 응교를 역임하였고, 1891년 수정청 도청(修正廳都廳)이 되어 『선원보략(璿源譜略)』 개찬(改撰)에 참여하면서 종친부 도정을 겸하였다. 1892년 형조 참의를 거쳐 우부승지·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1893년 공조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1894년 다시 대사간을 거쳐 종정사장(宗正司長)이 되었다.
1897년 8월 봉상사 부제조(奉常司副提調)에서 강화부윤으로 전임(轉任)되었고, 1898년부터는 중추원 의관·비서원승이 되었으며, 1904년 10월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4일 창산 도정(昌山都正), 11월 5일 창산군(昌山君)에 책봉되었다. 1905년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고, 1907년 11월 종1품에 올랐다. 1908년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06년 9월 훈1등 태극장(太極章), 1910년 8월 대훈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綬章)을 받았다.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 강점 직후인 1910년 10월 7일 발표된 후작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같은 해 10월부터 11월까지 조선귀족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11년 1월 13일 일본 정부로부터 16만 8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같은 해 2월 22일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참석하였다.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로서 한일관계에 특히 공적이 현저한 자’로 인정되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종4위에 서위(敍位)되었고, 1917년 12월과 1924년 1월에 각각 정4위·종3위로 승서(陞敍)되었으며, 이후 정3위·종2위를 거쳐 사망 직후 일본 정부로부터 특지(特旨)로 정2위에 추승(追陞)되었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을, 1928년 11월 쇼와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을, 1940년 11월 기원2600년 축전 기념장(紀元二千六百年祝典記念章)을 각각 받았다.
1915년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유공회원으로서 금전을 출연하였다. 1917년 불교단체인 불교옹호회의 고문이 되었고, 1919년 1월의 고종 장례식과 1926년 4월 순종 장례식에서 각각 종척 집사를 맡았다. 1923년 1월부터 1928년 5월까지 한성은행 감사,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선일지물(鮮一紙物) 감사로 재직하였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8월 조선총독부의 시국간담회에 참석하였고,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유림 조직을 통제, 지배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참여(參與)라는 직책을 맡았다. 1945년 3월 2일 사망하여, 장남 이덕주가 후작 작위를 세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