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소천(宵泉). 함경북도 명천 출생. 1916년 광진보통학교(廣進普通學校) 졸업 후 독학으로 1920년에 중동학교(中東學校) 중등과에 입학, 그 뒤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로 편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하였다.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 1931년에 문학부 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절인 1926년에 유학생이던 김진섭(金晉燮)·손우성(孫宇聲)·장기제(張起悌)·정인섭(鄭寅燮)·이선근(李瑄根)·김명엽(金明燁)·김온(金馧)·서항석(徐恒錫)·조희순(曺喜淳) 등과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 서구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귀국 후 본격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40년에 이르는 10년간 해외 작가 소개를 비롯한 작가론(作家論)에 치중하였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창립동인, 1936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도 활동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침묵을 지키며 칩거하였다.
광복 후 중앙문화협회(中央文化協會)·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 문학노선에 입각하여 좌익계의 프로문학 타파를 위한 반공자유문화(反共自由文化)를 강력히 제창하였다.
그 뒤 민주일보 편집국장, 민중일보 사장, 공보처 차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대표, 예술원 회원, 이화여자대학교 문리과대학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73년에 예술원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의 비평 활동은 일제하와 광복 후로 나눌 수 있는데, 민족의 자유·독립·자주를 기본 골간으로 하고 있다. 즉 일제하 평론에서도 서구 문학 소개에 치중하면서도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아울러 문학의 보편성에 대한 확신도 견지하고 있었다.
대표적 평론이라 할 수 있는 「조선문학은 어디로」(1934)는 일제에 의하여 전면 삭제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문학인은 우선 “우리가 의식 못하는 동안에 나날이 없어지려는 운명에 있는 조선말을 가장 중요시해야 하며, 작가 자신이 체험하는 무한정한 고민과 불안을, 또는 그의 절망적 오열(嗚咽)을 여실히 반영하는 문학”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1932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해외문학인의 임무와 장래」는 폐쇄적이고 국수적인 문학 풍토를 비판, 조선 문학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외국 문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화(文化)와 자유(自由)』(1952)·『모색(摸索)의 도정(道程)』(1965)이 있다.
주요 평론으로는 「사회학적 예술비평의 발전」(1931)·「평론계의 부진과 그 당위」(1933)·「행동정신의 탐구」·「전쟁과 문학」(1939)·「문화정책의 당면과제」(1949)·「민족문학정신의 재인식」(1948)·「김영랑(金永郎) 평전」(1956)·「문필가협회의 조직활동」(196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