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문상(文祥), 호는 석병(石屛). 이희청(李希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원회(李元晦)이고, 아버지는 헌납 이형(李亨)이다.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호조좌랑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를 주장,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그 뒤 다시 관직에 나가 병조좌랑·의정부사인·공조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이 때 시폐를 논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렸다.
1650년(효종 1) 장문의 소를 올려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여, 무군부도(無君不道: 왕을 무시하고 도의를 저버림)의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그의 횡포와 간계를 낱낱이 지적함과 아울러 사헌부나 사간원 등 대간의 기능이 엄하지 못하고, 부실하여져 역신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음을 공격, 결국 김자점의 죄상이 드러나 사형당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말직에 있으면서도 직간하는 위국충정이 뛰어나다 하여 1652년 사복시정에 특진되었고, 이 때 응지소(應旨疏: 왕이 내린 교지에 대한 응답하는 글)를 올려 더욱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 뒤 정평부사가 되어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와 군사력 증강에 노력하다가 1655년(효종 6)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저서로는 『석병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