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에 관해서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은 중국 유학과 한국 유학에서 핵심적인 문제였다. 중국철학사에서 인심도심 문제를 처음 제기한 기록은 『서경(書經)』이다. 『서경』의 「대우모(大禹謨)」 편에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순일하게 지켜서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중국 상고시대 순(舜) 임금이 제위를 우(禹)에게 물려주면서, 두 가지 상반된 특성을 가진 마음을 삼가서 살피라는 취지로 한 말이다.
후대의 『논어』와 『순자』에도 이 구절과 연관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나, 인심과 도심의 근본 의미를 직접 해석하지는 않았다. 11세기 북송대에 이르러 『상서(尙書)』 「대우모」의 인심과 도심에 대해 본격적인 두 가지 해석이 등장하였다. 하나는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견해로, 도심과 인심을 본체와 현상의 관계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명도(明道) 정호(程顥: 10321085)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10331107)의 견해로, 도심과 인심을 의식 작용의 상반된 두 현상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후 오봉(五峰) 호굉(胡宏)은 인심을 ‘욕심(欲心)’이라 불렀고, 구산(龜山) 양시(楊時)는 소식과 같이 도심과 인심을 본체와 현상의 관계로 보았다.
주희에 이르러 인심도심 문제는 성리학적 수양론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주희는 「중용장구서」에서 인심도심이 지니는 수양론적 의의를 깊이 인식하여 상세히 해설하고, 인심과 도심의 본질과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인심과 도심의 차이가 있는 것은 마음이 혹은 사사로운 형기(形氣)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올바른 성명(性命)에 근원하기도 하여 그 지각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심은 위태로워 불안하고, 도심은 미묘하여 보기 어렵다. 하지만 누구나 형기를 지니고 있으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누구나 성(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 인심과 도심은 한 마음 속에 섞여 있는데, 그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위태로운 인심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은미한 도심은 더욱 은미해져서 마침내 천리(天理)의 공평함[公]이 마침내 인욕(人欲)의 사욕[私]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 ‘정밀하게 한다’는 것은 인심과 도심의 경계를 분별하여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순일하게 한다’는 것은 본심의 올바름을 지켜 그것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희는 인심과 도심이 다른 까닭을, 도심은 선천적인 본성에서 나오고 인심은 신체적인 형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도심은 순수한 도덕적 양심에 근거하여 욕구를 배제하고 도덕적 행위를 추동하지만, 인심은 형기의 영향을 받아 욕망으로 흐르기 쉽다고 보았다. 그래서 『서경』에서는 도심을 ‘은미하다[惟微]’고 하였으며, 인심을 ‘위태롭다[惟危]’고 한 것이다.
주희는 인심과 도심의 이러한 특성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인욕과 순선을 정밀하게 구별하고 한결같이 유지하며, 이를 중도에 맞게 지켜내는 노력으로서 정일집중(精一執中)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중용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주희는 “반드시 도심이 한 몸의 주인이 되도록 하고, 인심이 언제나 그 명령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인심과 도심을 대립되는 두 가지 의식 활동으로 보고 그 발생 기원에 주목하는 관점은 주자의 제자 면재(勉齋) 황간(黃榦)에게도 나타났으며, 원대(元代)의 운봉(雲峰) 호병문(胡炳文)이나 동양(東陽) 허겸(許謙: 1269~1337)의 이론 속에서도 계승되었다.
인심도심설은 조선 성리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들로, 인심도심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하였다. 먼저 이황은 인심과 도심을 칠정(七情)과 사단(四端)에 각각 분속시켜, 전자는 선악이 섞여 있으나 후자는 순선(純善)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심은 칠정이 되고, 도심은 사단이 된다”고 하여 인심도심설을 사단칠정론과 연결하였다. 이황은 인심을 인욕으로 이해하여, 곧 욕구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부정적으로 보았다.
다만 그는 인심과 칠정의 가치론적 위상은 다르다고 하였다. 즉, “인심이라는 이름은 이미 도심과 상대하여 세워진 것으로, 자기 몸이 사사롭게 지니는 것에 속한다. 사사로움에 속한다고 말하였으니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다만 도심의 명령을 들어 하나가 될 수 있을 뿐, 도심과 뒤섞여 하나로 일컫기는 어렵다. 그러나 칠정에 이르면 비록 기운에서 발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것은 공평하게 세워진 이름이지 어느 한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곧 인심은 사사로운 편향성 속에 있지만, 칠정은 선악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황은 사단은 성발(性發)이지만 도심은 심발(心發)이라고 보았다. 그는 도심이 의향을 포함한 마음이라 하였고, 사단의 발현은 자연스럽게 일어나 인위적으로 안배할 수 없지만, 선한 의향은 인간이 형성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황에게 인간의 주체적 도덕성은 도심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으며, 도심은 단순히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한 의향을 발동시키는 근거로 이해되었다.
소재 노수신은 “인심은 도덕적인 것까지 모두 포함한 의식 활동의 전체”라는 명제를 인심도심설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도심을 도덕적 의식활동으로 규정한 주자의 이론은 성립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심이 전체 의식 활동이고 도심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인심과 도심을 분명히 구분하는 듯한 「대우모」의 취지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수신은 도심을 의식 활동의 본체인 ‘미발(未發)’로 해석한 정암(整菴) 나흠순(羅欽順)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이황의 주장과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는 인심과 도심을 마음의 작용인 감정[情]이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날 때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이는 “사람의 정이 발동할 때 도의를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고,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측은히 여기며, 의롭지 못할 때 부끄러워하고, 종묘를 지날 때 공경하는 것 등이니, 이것을 도심이라 한다. 또 정이 발동할 때 몸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 있다. 배고플 때 먹고 싶어 하고, 추울 때 입으려 하며, 힘들 때 쉬고자 하고, 정기가 성하면 이성을 생각하는 것 등이니, 이것을 인심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이는 “도심은 순수하게 천리이므로 선만 있고 악은 없으나, 인심은 천리도 있고 인욕도 있으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어야 하는 것은 성현도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것은 천리이고, 음식과 성욕으로 말미암아 악한 곳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인욕이다”라고 하였다. 즉 인심도 때와 상황에 맞으면 천리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인욕이 된다. 이는 결과적인 가치판단에 가깝다. 따라서 이이는 인심을 처음부터 억제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될 때 지나치지 않도록 조절하는 노력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 이이의 인심도심종시설이 자리한다. 이이에 따르면 인심과 도심은 이황처럼 근원에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심이 도심이 되기도 하고 도심이 다시 인심이 되기도 한다. 곧 인심과 도심은 상호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황과 이이 이후 조선 후기 인심도심설은 퇴계 · 율곡학파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이론적 전개 양상을 이루며 계승되었다. 퇴계학파 학자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은 이황의 호발설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분별설의 논리를 더욱 강조하고, 나아가 그 논리를 바탕으로 인심과 도심을 근원적으로까지 구분하려 하였다. 그는 인심과 도심은 본래 ‘일원(一源)이 아니다’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반면,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은 천지의 조화가 하나이듯이 인심과 도심도 일원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 위에서 주리 · 주기의 논리에 따라 인심과 도심을 구분하였다. 따라서 인심과 도심을 상대시켜 말한다고 해서 인심과 도심의 ‘근원이 하나가 아니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즉 이현일이 분별설의 논리로 이황의 인심과 도심을 상대시켜 보는 구도를 강화하였다면, 정시한은 이이의 일원적 관점 속에서 이황의 호발설을 재해석한 셈이다.
조선 후기 유의(儒醫)인 석곡(石谷) 이규준(李圭畯)은 이기합체(理氣合體)와 심성일물(心性一物)의 원리에 근거하여 인심도심설을 제시하였다. 그는 도심을 미발의 천도로 이해하고, 형기를 타고 이미 발하여 선악이 나누어지는 것을 인심이라고 보았다. 이규준의 인심도심론은 중화(中和)론으로 이어진다. 그는 성(性)보다는 심(心)을 도덕적 근거로 설정하고, 선악은 심이 오장(五藏) 혹은 형기(形氣)를 제어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이해하였다. 심은 미발의 중에 있을 때 도심이 되고, 심이 오장 혹은 형기를 제어하여 중절한 경우는 이발인 인심의 화(和)가 되므로, 그는 중과 화를 함께 논하였다. 이규준의 인심도심설은 생물학적 몸의 주재 기능을 중심으로 인심과 도심을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이와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인심도심설에 대한 비교적 논의에 따르면,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의 입장에서 근원을 하나로 두면서도 도의를 위하여 발한 도심과 식색(食色)을 위하여 발한 인심을 양분하여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곧 근원의 일치[源一]와 흐름의 갈래[流二]라는 두 측면을 조화시킨 결과였다. 그러나 한원진은, 이이처럼 인심을 주기에, 도심을 주리에 각각 대응시켜 양분할 경우 인심이 곧 악으로 규정될 위험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한원진은 인심이 결코 악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전제하고, 이에 따라 순선무악(純善無惡)의 도심, 유선(有善)의 인심, 유악(有惡)의 인심이라는 삼층 구조로 인심도심설을 해석하였다. 이것이 곧 이이와 구분되는 남당 인심도심설의 특징이었다.
조선 학계에서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전후한 시기부터 인심도심설을 둘러싼 다양한 이론적 견해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인심도심설은 거의 모든 학자가 언급할 정도로 당대 수양론의 핵심적인 철학 주제였다. 기대승, 박필주, 정제두 등도 인심도심설에 대한 연구를 남겼다. 이 논의들의 핵심 구조는 여전히 인심과 도심을 근원적으로 구분할 것인가, 아니면 도심이 인심 속에 통합되어 연속성을 지니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