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다. 원래 이름은 인홍사(仁弘寺)이다.
1264년(원종 5)오어사(吾魚寺)에 있던 일연(一然)이 옮겨와서 주지가 되었고, 1275년(충렬왕 1) 이 절을 중창한 뒤 인흥사로 개칭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친필의 액(額)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 공민왕이 쓴 현판도 있었다고 하며, 고려 말 이곳에서 수학한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陶隱集)』 권2 「기제인흥사(寄題仁興社)」시(詩)에 열조가 사액한 황금 글씨가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폐사되었으며, 1840년을 전후하여 남평문씨 일족이 절터를 새로이 구획하여 1995년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남평문씨본리세거지를 이루었다.
현재 절터에는 탑재(塔材)들과 조산(造山) · 주춧돌 · 돌유구 등이 있는데, 이 유물로 보건대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기에 창건되었고,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몇 차례의 중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이곳에는 삼층석탑 2기가 있었으나 1기는 1959년에 경북대학교로 옮겼고, 1기는 허물어진 채 흩어져 있다. 이 절에서 간행된 경전으로는 1278년(충렬왕 4)에 간행한 『불설장수멸죄다라니경(佛說長壽滅罪陀羅尼經)』과 1293년에 간행한 『대비심다라니계청(大悲心陀羅尼啓請)』이 전하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