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극순(克順). 임천손(林千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종(林悰)이고, 아버지는 임기문(林起門)이다.
1600년(선조 33)에 성균관 유생의 대표로 궁중과 연결되어 기세를 부린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으며,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승문원저작으로 재직하였으며, 1611년 겸춘추(兼春秋)로 경연에 입시하기도 하였다.
그 뒤 『선조실록』 편찬 때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으며, 1615년 지평·장령이 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입록되었다. 1617년 필선이 되고, 그 뒤 집의로 재직 중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에 소극적이었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을 탄핵하였으며, 이어 인목대비의 폐출 논의 때 폐출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 뒤 겸보덕·교리·사간·응교·집의 등을 역임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언관에 있으면서 폐모를 주장하는 등 전후 논계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죄로 남해(南海)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 뒤 인조에 의해 사면이 몇차례 시도되었으나 언관의 반대로 좌절되다가, 1635년(인조 13)에 양이(量移: 멀리 유배된 자의 죄를 감하여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일)로 감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