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예조좌랑, 지평,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08년 광해군 즉위 이후 헌납이 되었으며, 헌납 재직 중 선조의 인사 행정의 잘못을 비판한 소를 올린 정경세(鄭経世)를 공격하면서 피혐(避嫌)하여 정경세와 같은 입장을 지낸 홍가신(洪可臣)과 갈등을 빚었으나, 왕의 명으로 다시 출사(出仕)하였다. 이어 성균관직강을 거친 뒤, 1610년 함경도 안무어사(按撫御史)로 파견되었다.
그 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이 옥사가 일어났을 때 공이 많았다는 것으로 녹훈되었다.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을 재편찬했을 때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형제간에 소속 당파가 달라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출사하여 장령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613년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 혐의로 발생한 박응서(朴應犀) 옥사에 관련된 박치의(朴致毅)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주장한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을 귀양보내라는 정온(鄭蘊)이 상소에 관련되어 의금부의 신문을 받았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 논의 때 폐출을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이듬해 명의 원병 요청에 대한 논의 때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등 광해군의 입장을 옹호하는 처세를 보였다. 이러한 연유로 언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제수받기도 했으나, 1619년 병사하였다.
이후 후금과 영합하여 화친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관작을 추탈당했다. 그 뒤 1664년(현종 5) 아들 경상감사 임의백(任義伯)의 상소로 직첩(職牒: 관직 임명사령장) 을 환급받았다. 풍안군(豊安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대동야승(大東野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