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정변 ()

고려시대사
사건
고려 전기,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009년(목종 12)
종결 시기
1009년(목종 12)
발생 장소
개경
관련 인물
김치양|천추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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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강조의 정변은 고려 전기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이다. 강조가 1009년(목종 12)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즉 현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치양(金致陽)과 그의 아들 및 참소를 일삼던 유행간 등 7인을 잡아 베고 그 여당(餘黨)과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친속(親屬)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정의
고려 전기,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
발단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 사이에 결혼이 널리 행해졌다. 목종의 아버지 경종은 두 왕후를 두었는데,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로서, 이들은 모두 태조의 아들인 대종의 딸로 경종과는 모두 사촌 남매 간이었다.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는 경종이 죽은 뒤 천추궁(千秋宮)에 거처하였다. 한편, 경종의 숙부이자 태조의 아들인 왕욱(王郁: 安宗으로 추존)왕욱은 경종이 죽은 뒤 그의 왕후이며 질녀가 되는 헌정왕후를 사간(私姦)해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뒤의 현종이다.

이때 외척 김치양(金致陽)이 가짜 중이 되어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추한 소문이 나돌자, 성종이 김치양을 장배(杖配)하였다. 성종이 죽고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여 스스로를 '천추태후(千秋太后)'라 하였다. 그리고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을 삼고 뒤이어 우복야겸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에 임명하는 등 권세를 맡겨, 백관의 진퇴가 김치양의 손에 달려 있었다.

1003년(목종 6)에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생기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더불어 목종에게 아들이 없음을 기회로 그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였다.

경과 및 결과

당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모의는 태조의 유일한 혈통인 대량원군 왕순이 존재한다는 난관에 직면하였다. 그리하여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출가시켰다. 개성 숭경사(崇敬寺)에 머물게 하였고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기게 하였다. 대량원군을 여러 번 독살하려 했으나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한편, 김치양 일파는 1009년(목종 12) 목종을 살해하려고 대궐에 불까지 놓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놀란 왕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음모를 알게 된 목종은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 등과 의논해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皇甫兪義)낭장 문연(文演) 등을 신혈사에 보내어 대량원군을 데려오게 하였다. 한편, 서경의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에게 상경(上京)하여 호위할 것을 명하였다.

강조는 왕명을 받고 개성으로 오던 중에 왕이 이미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본영으로 되돌아갔으나, 정난(靖難)의 뜻을 품어 다시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개성으로 향하였다. 평주(平州)에 이르러 왕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주저하다가 목종이 생존하는 한 천추태후와의 관계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해, 왕의 폐립을 결심하고 분사감찰어사(分司監察御史) 김응인(金應仁)을 신혈사에 보내어 대량원군을 맞게 하였다. 그리고 목종에게 변을 일으키게 된 명분과 퇴위를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강조의 군대가 대궐을 침범하자 목종은 궁인과 내시, 채충순과 유충정(劉忠正) 등을 데리고 법왕사(法王寺)로 물러났고, 황보유의와 김응인 등이 맞아 온 대량원군이 즉위하니 이가 곧 현종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치양과 그의 아들 및 참소를 일삼던 유행간(庾行簡) 등 7인을 잡아 베고 그 여당과 천추태후의 친속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목종과 천추태후는 귀법사(歸法寺)를 거쳐 충주(忠州)로 추방되었는데, 불안을 느낀 강조는 목종 모자가 적성(積城)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살해했으며, 천추태후는 황주(黃州)로 도망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의의 및 평가

강조의 정변은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이 사건 후 강조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강조는 ' 중대성(中臺省)'이라는 기구를 통해 국왕의 신변과 왕명의 출납 과정, 왕명의 전달 과정을 장악하였는데, 이는 정변의 발생을 방지하고 아울러 국왕을 견제하고 감시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강조의 필요에 의해 설치된 중대성은 강조의 몰락과 함께 폐지되었다.

이 정변은 비록 왕의 폐립을 자행하고 왕을 살해하였으나,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고 왕권의 재정립을 기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한편, 김치양의 난에 대해서는 그가 변란을 일으킬 능력이 없었다거나, 무력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 또는 그와 관련된 기록이 조작되었을 정황이 있다는 점을 들어 난의 실재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견해에 따라서는 목종 대 정변이 강조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강조의 정변’이 아니라 ‘현종 및 그 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정변’으로 보기도 한다. 이 정변은 거란이 군주로 인정하여 책봉을 한 목종이 시해된 까닭에, 훗날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는 명분의 하나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상기, 『(한국전사)고려시대사』(동국문화사, 1961)

논문

김당택, 「고려 목종 12년의 정변에 대한 일고: 목종대의 사경발문과 관련하여」(『한국학보』 6, 일지사, 1980)
김보광, 「고려 초 강조의 정변과 중대성의 등장: 선휘원·은대와 중대성의 치폐과정에 담긴 의미」(『사학연구』 109, 한국사학회, 2013)
김아네스, 「고려시대 천추태후의 정치적 활동」(『한국인물사연구』 10, 한국사연구회, 2008)
김창현, 「고려초기 정국과 서경」(『사학연구』 80, 한국사학회, 2005)
이태진, 「김치양난의 성격: 고려초 서경세력의 정치적 추이와 관련하여」(『한국사연구』 17, 한국사연구회, 1977)
장종진, 「고려 목종 12년의 정변과 강조의 역할」(『남도문화연구』 24,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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