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출신으로 목종의 총애를 받아 지은대사 좌사낭중(知銀臺事左司郎中)이 되었다.
1009년(목종 12) 1월 아들이 없는 목종이 병이 들자 천추태후(千秋太后)와의 사이에 낳은 자기의 사생아로써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는 김치양(金致陽)으로부터 내응의 권유를 받았으나, 이 사실을 왕에게 고하였다.
한편, 감찰어사 고영기(高英起)를 중추원부사 채충순(蔡忠順)과 중추원사 최항(崔沆)에게 보내어 “이제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간당이 틈을 엿보매 사직이 장차 이성(異姓)에게 부쳐질까 두려우니, 상의 병이 만일 크게 위중하거든 마땅히 태조의 손으로 하여금 후사를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왕으로 하여금 대량원군(大良院君: 顯宗)을 맞아 후사를 삼게 하고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를 불러들여 김치양의 음모에 대비하게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개성에 들어온 강조는 현종을 영립하고 목종을 폐하였다. 또한, 같은 해 2월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그 무리와 천추태후의 친속 등 30여 명을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충주로 옮겨가는 목종을 적성현(積城縣: 연천군)에서 살해하였고, 유충정도 살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