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양(桐陽). 아버지는 임익진(林翊鎭)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용진(尹用鎭)의 딸이다.
1891년(고종 28) 첫 벼슬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고, 1895년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에 제수되었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곧아 남에게 굴하기 싫어하였고, 애국심이 투철했다. 철저한 보수적인 사상을 지녀 개화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1894년 동학란이 나자 왕명을 받들고 평양에 가서 청진(淸陣)을 밀탐하고는 청군이 패할 것을 알고 삼남(三南)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895년 8월에 일본인들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개화파 내각에서는 민비를 폐하자 임최수는 이를 분개하여 개화파 정부요인들을 제거하고자 참령(參領) 이도철(李道澈)과 함께 시위대(侍衛隊)의 병사와 응모한 의사들을 거느리고 동년 10월 11일 궐 내에 쳐들어갔으나 이진호(李軫鎬)의 배반으로 패하여 11월 15일 사형을 당하였다. 이듬 해 특명으로 복관되고, 충민(忠愍)이란 시호가 내렸다. 저서로는 『동양유고(桐陽遺稿)』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