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살은 일명 어차(魚杈 또는 魚叉)라고도 하며, 그 종류가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끝이 뾰족한 살상어구(殺傷漁具)에 속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작살류를 사용하는 자돌어업은 망어법(網漁法) 및 조어법(釣漁法)과 함께 3대 어법의 하나에 속한다.
작살이 발달된 것으로서 섬(銛, harpoon)이라는 것이 있다. 작살과 섬의 구별은 어획시에 자루[柄]가 손에서 이탈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 이탈되는 것을 섬, 이탈되지 않는 것을 작살이라고 하는 수가 많은데, 그것은 일반적인 특징에 의한 구별이고 예외가 많다.
섬은 대개 섬의 촉(鏃), 즉 섬두(銛頭)와 자루가 분리되어 있고, 양자는 줄로 이어져 있다. 그것은 섬에 찔린 목적물의 도망을 막기 위한 것이다. 전형적인 섬은 섬두가 대상물에 꽂힐 때 섬두와 자루가 분리되어 자루는 물 위에 뜨게 되어 있다. 이 물 위에 뜬 자루의 이동을 통하여 명중한 대상물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소형 섬은 화살을 불어 쏘는 통을 이용하여 발사하기도 한다. 이는 주로 새를 잡는 데 쓰는 방법이지만, 타이나 인도에서는 물고기를 잡는 데도 사용된다. 섬 가운데는 고무줄 같은 것을 달아 그 탄력을 이용하여 섬두를 쏘는 것도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 나라의 유어(遊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작살은 주로 내만성(內灣性) 어업에 사용되며, 그 대상물은 농어·감성돔 등이다. 섬은 주로 외양성(外洋性) 어업에서 사용되고, 그 대상물은 해수류(海獸類)·참치 등이다.
가장 원시적인 작살은 막대기의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단순한 형태의 것이다. 이러한 작살은 선사시대부터 세계 도처에서 사용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나 남아있지는 않다. 재료가 식물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러한 작살이 사용되고 있는 곳이 있다.
일례를 들면, 오스트레일리아의 토인은 단단한 나무 막대기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작살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작살이 발달하여 자루 끝에 촉을 단 작살로 변하였다. 그 촉은 두 갈래나 세 갈래, 또는 여러 갈래로 된 것이 있으며, 이 촉의 끝에는 대개 낚시미늘과 같은 미늘[迷龜, 또는 龜距]이 달려 있다.
작살 촉은 처음에는 동물의 뼈나 뿔 또는 돌로 만들어지다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금속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선사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석제(石製) 창, 즉 석창(石槍) 또는 석쟁(石鎗)은 지방에 따라서는 작살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패총에서는 작살류의 촉으로 사용되었을 것이 확실시되는 골각제(骨角製)의 자돌구(刺突具)가 더러 출토되고 있다.
최근에 발굴된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3동 수가동의 신석기시대 패총에서는 주로 사슴의 뼈로 만든 자돌구가 상당히 많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작살류의 촉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패총에서는 감성돔·농어·대구 등의 뼈가 출토되었다. 해진현상(海進現象)이 있었을 때 내만이 되어 있었던 수가리에서는 작살로 어류들을 잡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철기시대에는 철제의 작살이 만들어졌다. 경상남도 창녕군의 가야시대 고분에서는 길이 30㎝ 정도의 철제 삼지창(三枝槍)이 출토되었는데, 촉에는 모두 미늘이 있고 기부(基部)는 줄을 매기 위하여서인지 두 갈래로 갈라지게 만들어져 있다.
이로써 미루어볼 때 그것은 작살의 촉이나 섬의 섬두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무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형태를 지닌 삼지창들이 당시 작살로도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원시시대에서는 무기와 생산수단 사이에 확연한 용도상의 구별이 없었다는 사실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영조·정조 때의 학자 홍양호(洪良浩)가 저술한 『북새기략(北塞記略)』에는 각종 수산동물의 토획법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청어와 대구는 그물로, 명태는 낚시로, 문어는 작살로, 홍합과 해삼은 갈고랑이로 토획한다(捕靑魚夻魚以網 無泰魚以龜 文魚以叉 淡菜海蔘以龜)”라고 하였다. 문어 같은 것을 잡을 때도 작살이 사용되었다.
작살은 하천의 담수어를 어획하는 데도 사용되고 있었다.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는 얼음이 언 강에서 작살로 잉어를 어획하는 두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이에 사용된 작살구조가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길이 5∼6파(把, 발)의 가느다란 장목(長木) 끝에 모두 미늘이 달린 일근삼지(一根三枝)의 촉을 단 것이었고, 간두(竿頭)에는 작은 새끼줄을 묶고 그 일단은 작살 조작자의 팔뚝에 매었다고 한다.
이 작살의 촉은 수가리 패총에서 출토되었던 것과 유사한 유기삼지창(有鐖三枝槍)이었던 것이다. 새끼줄을 묶은 것은 명중한 잉어를 쉽게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첫째 어법은 겨울철 얼음이 얼기 시작할 무렵 강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무렵을 틈타 작살을 쥐고 얼음 밑을 엿보다가 잉어가 지나가면 작살로 찔러 잡는 것이었는데, 안명수쾌(眼明手快: 눈썰미가 있어 손이 매우 재어 일을 날쌔게 하는 것)하면, 열 번 찔러 한 번도 놓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둘째 어법은 얼음이 굳게 언 뒤에 사용하는 것으로서, 얼음에 구멍을 뚫어놓고 사람들이 몽둥이로 얼음을 두들겨 잉어가 움직이면 작살을 쥔 자가 얼음구멍 밑으로 잉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찔러 잡는다. 서유구는 이때 사용하는 작살을 “속호작전(俗呼斫箭)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작살의 한문식 표기이다.
섬은 한반도의 선사시대 유적에서 돌로 만든 석섬(石銛) 또는 동물의 뼈로 만든 골섬(骨銛)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그것이 과연 섬두로 사용된 것이었는가에 대하여서는 정밀한 고증이 필요할 것 같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는 섬은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접국 일본에서는 석기시대부터 상당히 발달된 각종의 섬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작살을 광의로 해석하면 섬도 작살에 포함된다. 자돌어업은 오늘날 능률적인 어구·어법의 발달로 산업적인 면에서는 그 비중이 크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섬이 최고로 발달된 형태인 포경포(捕鯨砲, harpoon)를 사용하는 근대적 포경업만은 아직도 중요한 어업 종목의 하나로서 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