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이나, 대성동 자유의 마을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대성동은 광복 직후에는 경기도 장단군 조산리에 속하게 되었는데, 6·25전쟁 직전까지 약 50세대 200여 명의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난도 가지 못한 채 그대로 눌러 있어야만 하였다.
휴전이 되고 대성동의 위치가 군사분계선 남쪽에 속하게 되자 유엔군과 국군은 피난가지 못하였던 주민들을 딴 곳으로 이주시키지 않고 그곳에 그대로 살게 하였다. 이후 이 마을은 ‘자유의 마을’ 대성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북한지역의 비무장지대에도 휴전협정에 따라 ‘기정동’이 형성되었다. 회색빛 아파트 형태의 건물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는 기정동은 대남선전 전초기지 구실을 하면서, 자유의 마을과 서로 깃발을 높이 올리는 경쟁을 벌이는 등 남북분단 및 대치상황을 그대로 반영해왔다. 그러나 실제는 기정동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1998년 현재 대성동에는 52세대 233명이 살고 있다.
세대당 평균 농토가 3만 평 정도이며 영농기술이 완전히 기계화되어 있어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또, 이곳 주민들에게는 국민의 4대의무 중 병역과 납세의무(전화료와 전기세는 제외)가 면제되고 있다.
그러나 문산에서 대성동까지 버스가 하루에 2회밖에 운행되고 있지 않은 점, 다른 지역의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는 자유의 마을에서 그대로 살 수 있지만, 다른 지역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는 반드시 그곳을 떠나서 살아야 한다는 점 등 불편한 점도 있다.
요컨대, 자유의 마을 대성동은 북한지역의 기정동과 함께 남북한의 분단·대치상황 및 민족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마을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