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고등재판소소장, 법부대신,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장박(張博), 치암(痴庵), 다카타니 요시(高谷義)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8년(헌종 14) 12월 16일
사망 연도
1921년 9월 2일
본관
인동(仁同)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
관련 사건
한성순보|갑오개혁
정의
대한제국기 고등재판소소장, 법부대신,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48년 12월 16일 함경도 경성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본명은 장박(張博)이었으나 1909년 3월 장석주(張錫周)로 개명했다. 호는 치암(痴庵)이다. 조선 말기에 박문국 사사(博文局司事), 법부아문 참의(法務衙門參議), 법부대신 등을 역임하였고, 대한제국기에는 궁내부 특진관, 박문과장(博文科長) 등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 유교대동회 회장, 대성학회(大成學會)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9월 2일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2년(고종 19) 서울에 올라와서 1883년 7월 박문국 사사에 임명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 창간에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타버리자 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로 전임되었다. 1885년 9월 박문국 동문학 주사(同文學主事)로 다시 발령받아 복간작업에 동참했다.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로 복간되는데 이때 주필로 활약했다. 1888년 6월 『한성주보』가 폐간된 후 1890년 2월부터 전보국 주사로 부임하여 1891년 북로전선(北路電線)을 가설하는 등의 업무에 종사했다.

1894년 7월 갑오개혁에 적극 관여하여 법부아문 참의로 승진했다. 1895년 6월 법률기초위원, 8월 법부 형사국장, 법부협판으로 법부대신서리 사무를 맡았다. 9월 고등재판소 소장을 겸했고, 11월 법부대신에 올랐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파면되고, 을미사변 주범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유길준(兪吉濬)·조희연(趙羲淵)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다카타니 요시[高谷義]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3년간 망명생활을 하다가 1907년 8월 귀국해서 9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10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어 종사하다가 1909년 2월 제실회계 감사원경(帝室會計監査院卿)으로 전임했다.

1907년 11월 대한협회 초대회장에 선출되었으나 12월 사임했다. 1908년 2월 망명자 모임인 강구회(講舊會)에 참여했고, 같은 달 대동학회(大東學會)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1월 박문과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3월 위생회 평의원, 호남철도주식모집연구회 찬성장, 5월 사립 창명(彰明)학교 교장, 7월 광흥(光興)학교 학무회 평의원장, 8월 마포사립보통학교 교장, 국채보상조사회 회장, 9월 한일하선(韓日河船)운송영업합자회사 회장, 농공연구회 회장,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1월 국채보상검정통합회 회장, 대한노동회 임원회 총재를 맡았고, 4월 흥사단에 융진(隆進)법률학교와 6월 사립 보명(普明)학교를 설립했다. 같은 달인 6월 대한측량총관회 회장, 7월 『한성순보』 찬성원을 맡았다. 11월 이토 히로부미의 송덕비를 건립하기 위한 이등공송덕비건의소(伊藤公頌德碑建議所)의 공사의장(工事議長)과 이토 히로부미 동상 및 표창을 만들려는 동아찬영회(東亞讚英會) 총재로 선출되었다. 1910년 3월 성균관에서 설립한 숭교의숙(崇敎義塾) 숙장으로 위촉되었고, 대동교회(大同敎會) 간친회에 참석해 기부했다. 4월 삼산의숙(三山義塾) 찬성장에 추대되었다.

국권피탈에 협력한 대가로 병합 직후 1910년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2월 김윤식(金允植), 조중응(趙重應), 조희연과 함께 일선사적 및 구관습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고, 3월 오성(五星)학교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 찬성원, 7월 문예구락부 발기총회 부장, 9월 조선귀족회 남작부 이사 겸 회관 수리공역(修理工役)으로 위촉되었다. 10월에는 수륙운송사(水陸運送社)를 설립하기로 하고 취지서와 규칙을 만들었다.

1912년 8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21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9월 메이지[明治] 천황 장례에 귀족대표로 참석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5주년을 선전하기 위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5월 특별회원으로 기부했으며, 8월 가정박람회(家庭博覽會) 찬조원에 선임되었다. 10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제2회 사원총회에서 특별사원으로 추대되었고, 11월에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에게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조선독립소요의 사정과 원인」이라는 건의문을 비롯해 「일선 근본문제 동화제조(同化諸條)」, 「장곡천(長谷川) 전 총독의 수순에 답하는 제조(諸條)」, 「민심만회에 관한 복서(復書)」 등을 발표했다. 1920년 9월 훈4등 서보장을 받았고, 11월 유교대동회 회장을 사임하고 총상협회(總商協會) 부총재에 선임되었으며, 12월 대성학회를 발기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사후 특지로 종4위에 추서되었다.

장석주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34∼44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1890.2.22; 1891.12.29; 1892.6.25; 1894.7.19; 1895.6.19; 1895.8.25)
『한성순보(漢城旬報)』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3(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신문사』(최준, 일조각, 196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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