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수 ()

장태수 선생 유물 / 영정
장태수 선생 유물 / 영정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시종원부경 등을 역임한 관료. 순국지사.
이칭
성안(聖安)
일유재(一逌齋)
이칭
남강거사(南岡居士)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1년(헌종 7)
사망 연도
1910년(순종 3)
본관
인동(仁同)
출생지
전라북도 김제
관련 사건
단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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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시종원부경 등을 역임한 관료. 순국지사.
개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一逌齋).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 출신. 내부협판 장한두(張漢斗)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1년(철종 1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제수된 뒤 전적 · 선략장군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예조정랑 · 사헌부지평 · 정언 ·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867년(고종 4) 양산군수에 임명되어 부국양병에 주력하고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영규(趙英珪)의 제단을 고쳐 제향하였다.

당시의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고 1872년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에 다녀왔다. 그 뒤 병조참의 ·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 동부승지 ·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 춘추관수찬관(春秋官修撰官) 등을 지내고, 1894년 동학란 중에 고산현감에 부임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사직하고, 스스로 남강거사(南岡居士)라 하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1904년 이후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 칙임관3등에 임명되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 일제의 회유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불충과 불효한 죄를 죽음으로 씻는다고 단식하여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신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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