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요찬은 해방 이후 수도사단장,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918년 충남 청양 출생으로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1948년 10월부터 제주 4·3사건 진압에 관여하였고 6·25 전쟁에서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4·19혁명 당시 계업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유혈사태를 방지해 4·19혁명을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즉각 지지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군사정부의 요청에 따라 요직을 역임하였다.
소위로 임관된 이후 국방경비대 소대장과 강릉 파견대장을 거쳐 1947년 소령으로 진급, 38도선 방어부대 대대장으로 근무하였다. 1948년 7월 경기도 수색에 있는 보병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1948년 10월부터 제주 4 · 3사건 진압에 관여하였고, 이듬해 1949년 1월 중령으로 진급하였으며 강경진압작전을 강행하여 제주도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오대산공비소탕작전 · 지리산공비소탕작전 등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50년 3월 헌병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재직 중 인민군의 서울점령 직전인 6월 27일 한국은행 금괴(金塊)를 진해로 무사히 반출하는 데 공을 세웠다. 1950년 9월 준장 진급과 동시에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어 원산 · 함흥 · 청진을 함락시키는 등 동부전선에서 전공을 올렸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흥남을 거쳐 철수하여 묵호에 상륙, 재정비한 뒤 총반격전에 나선 그는 수도사단장으로 강릉을 재탈환하고 이어 화천 북방에 위치한 수도고지에서 40일간의 혈전 끝에 중공군을 포함한 적군 2개 사단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1952년 7월 소장으로 진급됨과 동시에 제8사단장에 임명되었다.
휴전 뒤 1953년 7월 미국방성 초청으로 미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유학, 1년간 수학한 뒤 1954년 8월 제3군단장에 임명되고, 그 해 10월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었다. 1956년 9월 국방대학원에서 수학한 뒤 1957년 5월 제1야전군사령관, 1959년 2월에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 10만 감군, 정군(整軍), 군인연금제도의 신설 등 군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이 시기 좌익 경력 등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박정희(朴正熙)에게 도움을 주었다.
자유당에 의한 3 · 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 · 19혁명 때에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국민에게 신뢰감을 부여함으로써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4 · 19혁명을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사태 수습을 마무리짓고 허정(許政)의 과도정부 출범과 함께 곧 1960년 5월 참모총장직을 사퇴, 예편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수학 중 1961년 5 · 16군사정변을 맞았다. 이에 즉각 5 · 16군사정변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1961년 6월 군사정부의 요청에 따라 귀국하여 국방장관 겸 최고회의 기획위원장, 내각수반 겸 외무부장관, 1962년 3월에는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장관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1962년 6월 내각수반직을 사퇴하였다. 1963년 8월 8일 박정희의 대통령출마를 반대하는 이른바 〈최고회의 박정희의장에 보내는 공개장〉을 『동아일보』에 발표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 해 8월 11일 구속되었다.
10 · 15대통령선거에 자유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옥중 출마하였으나 야당단일후보 옹립을 위하여 선거 1주일 전에 자퇴하고 이어 정계은퇴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1월 초에 석방되었다. 그 뒤 다시 친정부노선으로 전향하여 1970년 인천제철 사장,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태극무공훈장(1953/1954), 을지무공훈장(1950/1952), 충무무공훈장(1950/1951), 국민훈장 무궁화장(1980),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