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성룡(盛龍). 호는 철주(鐵舟). 함경북도 경성 출신. 전재일(全在一)의 아들이다.
1910년 조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만주로 건너가서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입단한 뒤 귀국하였고, 3·1운동 때는 용정(龍井)의 은행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사관연수소를 졸업하고 교관이 되었다.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때 편의대(便衣隊)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애를 써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을 세웠다. 1927년에는 김좌진(金佐鎭)·지청천(池靑天) 등과 한국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에는 간도연변자치촉진회(間島沿邊自治促進會)의 부회장으로 있다가 일본 헌병대에 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청진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5년 중국의용군 총사령 왕덕림(王德林)과 독립운동에 관해 회담하였고, 계속 지청천부대와의 지하 연락을 담당하였다. 전성호는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론을 창도하고 투쟁심을 고취할 수 있는 신문 발간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3·1운동 직후 등사판으로 간도지방에서 찍어내는 『대한독립신문』·『우리의 편지』·『조선독립신문』 등 지하신문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 뒤 『간도일보(間島日報)』가 합법적으로 발간되자 이에 접근하여 민족독립운동을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해 귀국한 후 초창기의 국군에 입대하여 6·25전쟁 때는 육군 대령으로 영덕상륙작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