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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택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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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인물
해방 이후 천우사, 강남공업 등을 설립한 기업인.
이칭
설봉(雪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80년
본관
정선(旌善)
출생지
함경남도 문천
정의
해방 이후 천우사, 강남공업 등을 설립한 기업인.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설봉(雪峰). 함경남도 문천 출신. 아버지는 전종석(全宗錫)이며, 어머니는 김하익(金夏翼)으로, 3남3녀 중 장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4년 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말 부모를 따라 북간도(北間島)로 이주, 용정(龍井)에 있는 영신학교(永新學校) 고등과를 1918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모교인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용정중앙교회에서 김정신(金貞信)과 결혼 현재(賢宰) · 억재(億宰) · 순재(順宰) 3남을 두었다.

1929년 일본 고베상업고등학교[神戶商業高等學校]를 졸업한 뒤, 함남금융조합 · 조선일보사 등에서 일하다 간도 교하현(蛟河縣) 부근의 500정보를 구입, 선만주식회사(鮮滿株式會社)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단신 월남하였다.

1945년 미군정청 이재과장을 맡았다 그만두고, 1947년에 천우사(天友社)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신, 무역업을 개척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뒤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大成木材工業株式會社) · 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1960년 3월 우리 나라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 수출은 우리나라 수출의 주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 · 신진수출주식회사(新進輸出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그 해 천우사는 552만 달러를 수출하여 국내 민간기업 중 1위를 차지하였다.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江南工業)으로 개칭하고,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三益船舶)을 설립하였고, 제2회 수출의 날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는데,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탓으로 신앙심이 두터웠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로 취임한 것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취체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59년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 1961년 포풀라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재계에서도 8·15광복 후 대한상의(大韓商議) 재건운동, 한국무역협회 창립,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경제계의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4·19혁명허정(許政)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연으로 상공부장관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35일간의 단명으로 끝났다. 정부는 그의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적과 민간경제외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설봉전택보전기』(설봉문화재단설립준비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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