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피혁주식회사는 1911년 9월 24일 영등포에 공장을 두고 설립된 화학공업회사로 특히 피혁 제품을 생산하였다. 1911년 당시 일본에서는 도쿄(東京)의 일본피혁주식회사나 오오사카(大阪)의 동양제혁주식회사를 비롯하여 개인 경영 제혁업자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혁 제품에 대한 수요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수출을 위한 피혁 제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는데, 이를 뒷받침할 원료가 부족했다. 따라서 한국의 우피를 개량하여 양질의 제품을 일본으로 수출할 경우 막대한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착안하여 일본 피혁업계의 중진으로 대만 개발의 원로라 불리던 가다 긴자부로(賀田金三郞)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것이 조선피혁이다.
조선피혁은 1912년 1월까지 공장의 건축 및 기계 설비를 마치고 2월 1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조선피혁 공장을 영등포에 둔 이유는 한강 수리의 편리함과 함께 양질이면서도 풍부한 지하수의 존재, 그리고 경부철도와 경인철도의 접합점이라는 교통상의 유리함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영등포역에서 조선피혁 당산리공장까지 약 1마일에 달하는 철도 인입선을 설치했는데, 이 광폭 인입선은 원료와 자재 그리고 완성품의 수송에 편리함을 제공했다.
1912년 11월부터는 조선피혁 내에 재화 공장을 설치하였다. 조선피혁에서 생산한 피혁을 이용하여 군수용품을 제조하기 시작한 것인데, 생산된 물량은 조선과 만주에 있는 육군과 조선총독부 등에도 공급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군화 등의 수요 증가는 조선피혁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특히 러시아로 많은 물량을 수출했다.
1917년 5월에는 긴자부로의 양자이자 나중에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의 중진으로 경성상업회의소 및 조선상업회의소의 회두(會頭: 회장)를 지내게 되는 가다 나오지(賀田直治)가 사장에 취임하여 오랫동안 조선피혁을 이끌었다. 1925년 7월에 발생한 을축년 대홍수로 커다란 손실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1928년 해군의 지정 공장이 되었고, 1931년부터는 육군 병기 본창의 지정 공장으로 지정받아 안정적인 영업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조선피혁은 일본의 피혁 제품에 대한 수요 증가에 부응하여 설립된 회사로서 회사 설립 초기부터 군수산업으로 분류되어 조선총독부로부터 오랫동안 보조금을 받는 등 정부 지원 하에 성장하였다. 조선피혁은 존립 당시 규모가 동양 최대라 할 정도였으며, 해방 뒤 적산공장으로서 개인에게 불하되어 몇 차례 경영자를 바꿔 가며 운영되었다. 1969년 경영난으로 대성목재(大成木材)에 흡수·합병되어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