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봉제(鳳濟). 본관은 나주(羅州). 평안남도 안주 출생. 평안북도 영변과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그 즈음에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김관호가 운영하던 삭성회화연구소에 들어가 그림에 입문했다. 1929년부터 신문에 삽화를 게재하고 수채화를 그려 1931년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에 입선하였다.
일본의 사상가인 니시다 덴코(西田天香)에 심취하여 27세에 출가를 결심하고, 193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니시다가 이끄는 교토 소재의 종교단체 일등원(一燈園)에 들어가 7년간 수행했다. 이 때 이름을 전화광(全和光)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43년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전람회에 출품하여 수상했다.
1945년 광복 후에도 계속 교토에서 화가 활동을 하며 독실한 불심(佛心)으로 「관음상 입혼식(入魂式)」(1946년)·「절이 보이는 풍경」(1949년) 등을 그렸다.
1950년 6·25 발발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본에서 가슴 아프게 보게 된 심정을 「어느 날의 꿈-학살-」·「갓난이의 매장」·「재회-갓난이의 부활-」·「군상」 등의 침통한 주제로 그림을 그려 주목을 끌었다. 그 뒤에도 「피난민 행렬」·「전쟁 고아」 등 비통한 분위기의 그림을 계속 그렸다.
1960년 무렵부터는 깊은 불심의 마음과 명상과 평화를 기도한 청정하고 고결한 분위기가 담긴 「백제관음」(1964년, 1971년 외 연작)·「사천왕-현세를 노려보다-」(1967년)·「보살과 태양」(1967년)·「미륵보살」(1970년)·「불상과 자화상」(1974년)·「관음만다라」(1975년) 등 고요한 형상과 신비감의 색상 및 경건한 공간 분위기를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표현주의 수법으로 종교적 철학관을 내재시킨 이 불상 주제 연작 외에, 문학적 시정(詩情)을 느끼게 하는 「잡초 속의 꽃」(1966년)과 주로 모란을 그린 「꽃과 태양」의 연작(1970년대 후 지속)도 내면적으로 평화를 기도한 그림이었다.
전화황(全和凰)으로 이름을 두 번째 바꾸어 쓰기 시작한 것은 1958년부터였다. 그림 생활과 함께 꾸준히 쓴 문학 소설도 높은 평가를 받아 1958년에는 『갓난이의 매장』이 출판되었다. 1976년에는 오사카경제신보사에서 『전화황소설집』이 간행되었다.
일본으로 떠난 지 41년만인 1979년 한국과 서울 방문이 처음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북한 계열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朝總聯)〕에 가담하였다. 1982년 서울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전화황 화업 50년전’이 대규모로 열리면서 크게 환영받았다. 그 뒤에도 교토에 있는 자신의 미술관과 화실에서 제작 생활을 지속하였다.
1993년 재일 동포 수집가 하정웅(河正雄)이 기증한, 그의 대표작을 포함한 92점이 광주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첼리스트 전봉초(全鳳楚)가 친동생이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전화황 탄생100주년 기념전》(2009)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