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곡사(亭谷寺)’ 또는 ‘정곡사(停穀寺)’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된 때에는 패엽사(貝葉寺)의 말사였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말 이전에 창건되었으며, 사찰명은 고려 말에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모시고 왔던 원나라의 주태사(周太史)가 이곳에서 수레를 멈춘 데서 기인한다는 설과 고려의 어느 왕이 이곳의 산수풍경을 사랑하여 오랫동안 수레를 멈추고 구경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세종 때에는 교종(敎宗)에 속하였으며, 상주하였던 승려는 70명이고 소속 전결(田結)은 150결로서 당시의 사찰로는 매우 큰 규모에 속하였다. 또한 정조 때인 1797년(정조 21) 7월 21일과 22일의 큰 비로 정곡사의 건물 78칸이 무너졌다고 하니 조선 초기 절의 규모가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청풍루(淸風樓)·영당(影堂)·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서 규모가 웅장하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 대웅전 앞의 불두화(佛頭花)도 유명하다. 대웅전 옆에 있는 영당은 주태사의 화상을 봉안해둔 곳으로, 노국공주와 함께 원나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이 절에 화상(畵像)을 두었다고 한다. 그 뒤 절 밑 주촌(周村)에 살고 있던 그의 후손들이 1747년(영조 23)에 영정을 새로 그려 모셨는데, 원래의 화상은 그 후면에 붙여두었다고 한다.
부속 암자로는 선림암(禪林庵)·길상암(吉祥庵)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절 주위에는 고려 말의 태사(太史) 네 사람이 신선처럼 놀았다는 사선대(四仙臺)를 비롯하여, 용이 살고 있다는 용연(龍淵)과 용연폭포가 있는데, 가뭄이 있을 때마다 용연에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 밖에 절 부근에서 나는 잣과 송이는 도내의 명산물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