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직(公直), 호는 추천(秋川). 정복겸(鄭福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길(鄭惟吉)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정창연(鄭昌衍)이며, 어머니는 한세건(韓世建)의 딸이다. 판서 정광성(鄭廣成)의 아우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수찬(修撰)·정언(正言)을 지내고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자 이론(異論)을 내세워 반대하고 청의(淸議)를 따랐다.
그 뒤 1616년 사간이 된 뒤, 상의원정(尙衣院正)·사인·응교·전한·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대비삭호(大妃削號)를 포함한 폐모론이 재론되었을 때, 아버지 창연이 두문불출하여 정청(庭請)에 불참, 화를 입을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를 위하여 대신 참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사간에 임명되자, 과거의 정청참여를 자책하여 간관으로서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지적, 사퇴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괄(李适)의 난 때 형 정광성은 아버지를 모시고 그는 어가(御駕)를 호종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형이 임금을 따르고 자신이 아버지를 모심으로써 형제가 군부(君父)에 대한 충효를 함께 실천하였다 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뒤 예조참의·충청도관찰사·대사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