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국보유적 제112호. 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된 때에는 귀주사(歸州寺)의 말사였다. 838년(민애왕 1)에 일신(日信)이 창건하여 운흥암(雲興庵)이라 하였고, 998년(목종 1)에 중창하여 운흥사라 하였으며, 1582년(선조 15)에 지헌(智軒)·도견(道堅)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1636년(인조 14) 9월 화재로 소실된 뒤, 1643년까지 10년에 걸쳐서 대웅전·승당·선당·만세루를 중건하였으며, 1660년(현종 1)에 성정(性靜)이 천축국의 비보(秘寶)로 전해오던 정광여래(定光如來)의 치사리(齒舍利) 2과(顆)와 보궤(寶櫃)·감로병·당종(唐鍾)·오색면포단 등을 이곳에 모신 뒤 정광사라고 개칭하였다.
1671년에는 명부전을 중건하고 시왕전루(十王殿樓)를 3년에 걸쳐서 준공하였으며, 1681년(숙종 7)에는 향적전(香積殿)을 중수하고 200근에 달하는 대철증(大鐵甑)을 만들었다. 1712년에는 명부전을 중수하였고, 1726년(영조 2)에는 대웅전과 보살성당을 중건하였으며, 1737년에는 사천왕을 조성한 뒤 천왕문과 팔상전·영천루 등을 건립하였다. 1772년에는 만세루를, 1782년(정조 6)에는 용흥교와 체계문을 세웠고, 1795년에는 향로전을 중건하였으며, 1796년에는 풍엄(豊嚴)·체윤(體胤)이 금불상을 비롯하여 지장보살상·시왕상 등 30여 존상을 조상하였다. 그러나 1814년(순조 14)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1817년에는 환정(幻靜)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839년(헌종 5)에는 이 절에 전해오던 4보(寶)가 동해로 옮겨졌고, 불상 1구는 복흥사에서 빌려갔다. 1848년에 김담(金潭)이 전각을 개수하고 요사를 정비하여 겨우 향화를 이어갔다. 그 뒤 1875년 (고종 12)에 이 절의 종을 남곤영(南閫營)으로 가져감에 따라 동감사(東監寺)에서 종을 가져와서 봉안하였다. 이 절의 편액과 주련은 대부분이 김정희(金正喜)의 작품인데, 그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 이 절에 와서 있으면서 직접 글을 쓰고 현판을 조각하여 단 것이라고 한다. 2007년 단청을 수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