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남중(南仲), 호는 헐오재(歇五齋). 고려 현종 때에 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였던 정배걸(鄭倍傑)의 26대손으로 청은군(淸隱君) 정진로(鄭鎭魯)의 손자이고, 첨지중추 정홍진(鄭鴻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로 이기만(李淇萬)의 딸이다. 숙부 정홍관(鄭鴻觀)에게 입양되었다.
41세가 되던 1827년(순조 27)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와 사간원·홍문관 등 삼사의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으며 세자시강원필선에 이르렀다. 그는 사서(史書)의 체재를 충실하게 본뜬 「천군본기(天君本紀)」를 지어 일명 ‘심사(心史)’라 하였다.
이 작품은 인간의 성정(性情)을 의인화하여, 사람이 태어나서 30세가 될 때까지의 심상의 변화과정을 기년식(紀年式)으로 그린 우화소설(寓話小說)이다. 작품의 총론과 내용으로 보아 그는 당시 유학사상, 특히 심성론에 대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남인계열의 학자로 재질과 인품을 갖추었으나 당파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일생을 시문과 학문에 헌신하였다. 이조참판·홍문관제학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