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선소리 산타령 기예능 보유자.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출신으로 천부적인 성대를 타고났다. 20세 무렵 문세근에게 소리를 배웠고, 그 뒤 명창으로 이름난 학강(鶴崗) 최경식(崔景植)에게 자주 드나들며 노래를 즐기다가 해방 후에 본격적으로 최경식 명창에게 가사를 익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경서도창을 위주로 하는 민요 단체인 국악연예사(國樂演藝社)가 발족되고, 정득만이 운영부장을 맡았다. 20대부터 50대까지 30여년 동안은 노래 부르는 시간 외에도 정원사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1968년 4월, 나이 61세가 되어서야 이창배 등과 함께 선소리 산타령으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받았고, 1969년부터 전수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은미(李銀美) · 지화자(池花子) · 최애자(崔愛子) · 정현정(鄭鉉靜) · 최영란(崔英蘭)이 전수생이 되었으며, 최창남(崔昌南) · 황용주(黃龍周)가 장학생으로 지정되었다.
「선소리 산타령」은 매년 정월 벌어지던 ‘담교놀이’의 한 마당으로, 보통 7∼8명의 소리패가 연창하던 노래다. 그들은 선소리패를 이루어 함께 익히고 놀음놀이에도 무리지어 다니곤 했다. 당시 유명했던 소리패들로는 뚝섬패 · 방아다리패 · 과천패 · 호조다리패 · 왕십리패 · 자하문패 등이 있다.
정득만과 이창배는 일제시대부터 무대에서 산타령을 불렀다. 정득만은 과천패의 모갑이인 소완준에게 배웠고, 이창배는 왕십리에 살아서 이명길과 탁복만과 더불어 늘 불러서 익혀 왔다. 정득만은 경기민요에 능하며, 12잡가 중에서도 비교적 배우기 어렵다는 적벽가 · 제비가 · 평양가 등은 누구보다로 능숙하게 잘 불렀다. 정득만은 숨이 길고 청(淸)이 높아서 여자들과 잘 어울리는 목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인 묵계월(墨桂月) · 안비취(安翡翠) · 이은주(李銀株) 등도 한때는 정득만의 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