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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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업원 구기비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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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현재 개성)과 한양(현재 서울) 도성 내에 있었던 고려시대 비구니 관련 사찰. 여승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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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경(현재 개성)과 한양(현재 서울) 도성 내에 있었던 고려시대 비구니 관련 사찰. 여승방.
내용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164년(의종 18)의종이 정업원에 이어(移御:임금이 행차함)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정업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 천도 이후인 1252년(고종 38)에는 박훤(朴暄)의 집을 정업원으로 삼아 성 안에 있던 비구니를 살게 하였고, 환도 후에는 다시 개경에 정업원을 두었으며, 충숙왕 때 남편 이집(李緝)을 살해한 반씨(潘氏)를 정업원에 있게 하였다. 고려 말에는 비구니 묘장(妙藏)이 한때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다.

한양에 도읍을 건설한 조선 초에는 개경의 정업원을 옮겨 건립하였다. 정업원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응봉(鷹峰) 아래 창경궁(昌慶宮)의 서쪽이었다는 설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아래였다는 주장이 있다. 동망봉 아래에 1771년(영조 47)영조가 세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업원이 동망봉 아래 있었다는 설은 단종의 비 송씨가 동망봉에 있었던 사실과, 또한 그가 정업원 주지로 있었던 사실이 얽혀서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영조가 비를 세운 것은 이미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 이후였기 때문이다. 1408년(태종 8) 주지로 있던 공민왕의 후비가 죽자, 소도군(昭悼君)의 처 심씨(沈氏)를 정업원의 주지로 삼았다. 정업원의 니승(尼僧:비구니 스님)들은 대부분 사족(士族)들이었고, 주지는 왕족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노비와 별사전(別賜田: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전답), 분수료(焚修料 : 향을 피워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며 기도하는 데 드는 비용)가 지급되는 등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태종 때부터 유생들에 의해 정업원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1448년(세종 30) 척불정책에 의해 폐지되었다. 1457년(세조 3) 다시 정업원 복립(復立)이 결정되고, 1459년 원사(院舍)가 중창되었다. 이 해에 사원의 비용으로 공포가(貢布價)를 특사했고, 이듬해에는 왕이 두 차례 행치하는 한편, 200구의 노비를 지급하였다.

국가적인 비호는 예종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성종 때에는 다시 유생들의 정업원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여러 차례 대두되었다. 그 뒤 1505년(연산군 11) 왕의 타락정치로 정원은 다시 혁파되고 니승들은 성 밖으로 축출되었다.

그 뒤 정업원은 독서당(讀書堂)으로 사용되다가, 독서당을 두모포(頭毛浦)로 옮긴 1517년(중종 12) 이후에는 빈 절로 남게 되었다. 중종은 정업원을 다시 세우고자 했지만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550년(명종 5) 3월에 다시 세웠다.

이 때에도 유생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정업원을 후궁들의 별처로 한다는 구실을 붙여 인수궁(仁壽宮)이라고 했다가 뒤에 다시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운동은 꾸준히 계속되었지만, 특히 선조가 즉위한 이후에는 격심해졌다.

그리하여 1612년(선조 40)에 정업원은 폐지되고 비구니들은 성 밖으로 쫓겨났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업원(淨業院)의 치폐(置廢)와 위치에 대하여」(현창호, 『향토서울)』 11,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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