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화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교리, 선교관,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순일(舜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9년(헌종 15)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청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개항기 때, 교리, 선교관,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순일(舜一). 아버지는 황주목사 정익영(鄭翼永)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0년(고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춘추관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중앙의 여러 관직을 지낸 뒤 암행어사로 함경도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1874년 홍문관수찬에 제수되었다. 1875년 서장관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줄곧 홍문관에서 관직생활을 하여 1878년 교리로 승진하였으며, 홍문관에서 왕에게 올리는 상주문에 여러 차례 연명으로 가담하였다.

1879년 감시 초시의 시관이 되었다가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물의가 일어나 잠시 관직을 깎였다가 곧 복귀되었고, 이듬해에 선교관(宣敎官)으로서의 노고로 진급되었다.

1882년 대사간에 제수되어 평생의 관직생활에서 최고 관직에 올랐으며, 이듬해 대사간을 한차례 더 역임하였다. 함경도암행어사로 있던 1873년 겨울 경원에서 도내에 밀수입된 서양포목을 색출하여 모두 불태운 바 있고, 1874년에는 홍문관수찬으로서 상소하여 왕에게 서양문물의 침투상을 언급하면서 유학중흥을 위한 교육강화와 인재등용을 요청하였다. 개항기에 위정척사론의 입장에 서 있던 중앙관료의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