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순일(舜一). 아버지는 황주목사 정익영(鄭翼永)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이다.
1870년(고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춘추관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중앙의 여러 관직을 지낸 뒤 암행어사로 함경도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1874년 홍문관수찬에 제수되었다. 1875년 서장관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줄곧 홍문관에서 관직생활을 하여 1878년 교리로 승진하였으며, 홍문관에서 왕에게 올리는 상주문에 여러 차례 연명으로 가담하였다.
1879년 감시 초시의 시관이 되었다가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물의가 일어나 잠시 관직을 깎였다가 곧 복귀되었고, 이듬해에 선교관(宣敎官)으로서의 노고로 진급되었다.
1882년 대사간에 제수되어 평생의 관직생활에서 최고 관직에 올랐으며, 이듬해 대사간을 한차례 더 역임하였다. 함경도암행어사로 있던 1873년 겨울 경원에서 도내에 밀수입된 서양포목을 색출하여 모두 불태운 바 있고, 1874년에는 홍문관수찬으로서 상소하여 왕에게 서양문물의 침투상을 언급하면서 유학중흥을 위한 교육강화와 인재등용을 요청하였다. 개항기에 위정척사론의 입장에 서 있던 중앙관료의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