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군술(君述).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이다.
명릉참봉·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직장(直長)·군기시별제(軍器寺別提) 등을 역임하고 연풍현감(延風縣監)에 이르렀다.
1728년(영조 4) 정희량(鄭希亮) 등이 난을 도모하였을 때 관직에서 물러나 함양으로 돌아와 충으로써 종당(宗堂)을 격려하고, 토적(討賊)의 계책을 제시하였으며, 스스로 가동(家僮) 몇 사람과 함께 난 진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난 평정 후 박문수(朴文秀)가 포전(褒典)을 청하고, 조정의 신료들도 이에 찬성하였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809년(순조 9) 충신으로 일컬어지면서 특별히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